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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타 Feb 23. 2024

광폭한 흑백 바람

토리노의 말(2011). 벨라 타르 감독.


최근 몇 년(한 2~3년) 동안 ‘극장에서 봤더라면 훨씬 더 좋았을 텐데’라고 생각하며 아쉬웠던 영화가 둘 있다. ‘탑건 매버릭’과 바로 이 영화 ‘토리노의 말’이다.


35mm 흑백 필름으로 찍은 ‘토리노의 말’은 장면 하나하나가 너무나도 멋진 사진 작품이다. 디지털로는 이런 질감을 만들기 힘들다. 영화 필름 중 아무거나 하나를 쓱 골라서 인화해도 될 것 같다. 그저 가만히 화면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시각적 쾌감이 느껴진다. 이 영화는 흑백이어야만 하는 이유가 분명하다. 영화의 중요한 주제이자 소재가 빛이다. 그리고 그 빛을 빛나게 하는 것은 짙은 어둠이다. 


2시간 반 내내 ‘광폭한 바람’이 휘몰아친다. ‘광폭한 바람’은 영화 속 책을 읽는 장면에서 등장하는 대사이기도 하다. 거센 바람 소리와 음산한 음악이 뒤섞인다. 음악 자체도 무척 유니크하다. 영화를 보다가 잠깐 눈을 감고 소리에 집중해 보았다. 소리만으로도 ‘이야기’가 느껴진다. 화면뿐만 아니라 소리 역시 영화관에서 크게 들어야 하는데.


벨라 타르 감독은 ‘광폭한 바람’을 시각화하려고 헬기를 동원했다고 한다. 화면 레이아웃과 조명 연출도 너무나 아름다웠다. 이 화면을 디자인하기 위해 직접 집을 지었고 빛이 들어오는 창문의 개수, 크기와 위치를 세밀하게 조정했다고 한다. 언덕 위에 외롭게 서 있는 나무 한 그루도 심은 것이 아닐까. 이 언덕은 한 장면에서 마치 바다의 수평선처럼 보였다.


영화는 6일 동안 벌어지는 일을 다룬다. 아버지와 딸 두 명이 주로 등장한다. 대사는 거의 없다. 별 의미 없어 보이는 일상생활이 롱테이크로 길고 지루하게 반복된다. 그런데 미묘한 사건들이 하나씩 터지면서 나도 모르게 영화에 몰입하게 된다. 지루함은 영화를 재미있게 만들어 주는 하나의 장치로 작동한다.


영화는 철학자 니체가 붙잡고 울었다는 ‘토리노의 말’을 내레이션과 자막으로 소개하면서 시작한다. 그 뒤로 말 한 마리가 마차를 끄는 장면이 길게 이어진다. 영화 중반에 그 말이 토리노의 말처럼 마차를 끌지 않고 버티고 서는 장면이 나온다. 당연히 영화 속에 니체의 철학이 담겼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니체의 반체제적인 (안티 크라이스트 같은) 사상이 결말 부분에 묘사되었다고 생각했지만, 관객의 해석에 따라서는 니체의 철학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혹시나 영화를 못 보신 분들에게 스포일러가 될까 자세한 얘기는 생략합니다)


이 영화는 끝없이 반복되는 인간의 삶에서 오는 절망과 파멸을 묘사한 것이라고 느꼈다. 마지막 대사는 파멸에 맞서려고 하는 인간의 의지일 수도 있고, 아니면 아예 그와 반대로 모든 것을 포기한 나약한 인간의 체념일 수도 있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의미 없이 보이는 일상의 삶 자체가 의미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감독의 의도가 어떤 것인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이 영화에 관한 감독의 인터뷰라던가 평론가들의 해석을 일부러 보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관객들이 이 영화를 어떻게 보았는지 궁금하다. 아마도 여러 자료를 뒤져 볼 것 같다.(실은 이 글을 업로드하기 전 여러 자료들을 보면서 궁금증을 풀었습니다)


영화라는 매체만이 만들 수 있는 감응을 선사해 주는 영화.

_

덧.

아빠와 딸이 함께 보면 좋은 영화. (반 농담입니다만 반 진담입니다. 누구와 봐도 좋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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