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에서.
내 앞에 앉아 있는 한 사람이 종이책을 읽고 있다. 모르는 사람이 지하철에서 종이책을 읽는 모습. 정겹고 낯설다. 옆사람에 피해를 주지 않으려 어깨와 팔을 좁히고 양손으로 책을 쥐었다.
그 옆에 옆 자리에는 20대 정도로 보이는 젊은 남자가 앉아 있다. 쩍 벌린 한쪽 다리를 덜덜 떨면서 양손으로 잡은 휴대폰 화면을 정신없이 누르고 있다. 팔다리로 공간을 넓게 점유한 그 남자 바로 옆에 온몸을 최대한 움츠리고 앉은 여성의 표정이 찌푸려져 있다.
그는 책을 거의 다 읽은 것 같다. 오른손에 쥔 책의 두께가 얇다. 많아야 대여섯 장 정도 남았다. 순간 그가 부러워졌다. (그는 젊은 여성이다. 2~30대 정도로 보이는) 그는 이제 곧 책 한 권을 다 읽으면 느끼게 될 포만감을 즐기겠지.
책을 다 읽으면 배부르다. 누군가 책과 와인을 비교한 글이 떠오른다. 좋은 책이 주는 ‘쾌락’은 숙성이 잘 된 좋은(고급) 와인을 마시는 것과 비슷하다는. 그럴듯한 비유다. 그런데 숙성이 잘 된 맛있는 와인은 너무 비싸다. 맛있을수록 더 비싸진다. 하지만 책은 더 좋은 책이 더 비싸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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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
이 글을 쓰다 보니 와인이 먹고 싶어 지는군요. 시간을 투자해서 열심히 뒤지면 싸고 맛있는 와인도 꽤 많은데요. ‘좋은’ 책 역시 수많은 책들 속에 숨어 있다는 것도 와인과 책의 비슷한 점 중 하나겠네요.
덧. 추가.
예전에 가성비가 아주 뛰어난 만원 대 와인에 숙성이 잘 된 (약간은 단 맛이 도는) 깍두기를 먹은 적이 있었는데, 의외로 잘 어울려서 깜짝 놀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