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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윤석 Jun 19. 2022

작문 연습: 바닥

나는 수치스러운 과거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가?

꿈을 꾸었다. 바퀴벌레가 나왔다. 무슨 내용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소변을 보고 싶은 마음이 나를 꿈에서 깨웠다. 화장실 문을 열고 불을 켜니, 바닥 구석에 놔둔 샴푸 옆에 내가 가져다 놓은 적이 없는 검은색 물체가 하나 보였다. 세상에, 바퀴벌레였다. 하, 오랜만이다. 한숨을 내뱉으며 화장실용 슬리퍼를 벗어 망설임 없이 벌레 위로 내리쳤다. 벌레는 잽싸게 세면대 밑으로 몸을 피했다. 하지만 그래봤자 부처님 손안이었고, 두 번째 공격이 벌레를 강타했다. 꾹 누르고 양방향으로 두 번 돌렸다. 벌레는 으깨졌다.


두루마리 휴지로 시체를 닦고 변기에 던졌다. 힘을 주어 짓누른 탓에 시체가 흩어져 세 번이나 닦아야 했다. 다 닦았다고 생각하자 락스를 집어 들었다. 벌레의 체액이 남은 화장실 바닥에, 흔적이 남은 슬리퍼 바닥에 뿌리고 벅벅 닦았다. 바퀴벌레는 없어야 해. 닦으면서도 못 치우고 남은 시체 조각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했다. 닦는 데 쓴 솔도 꼼꼼히 씻었다. 물을 내리고, 소변을 보고, 손을 씻고 잠들었다. 그러고도 마음이 편치 않아서 아침에 화장실 전체를 다시 한번 꼼꼼히 닦았다. 비로소 생각이 사라졌다.


꿈을 꾸었다. 고양이가 나왔다. 몇 년 전 공부하기 위해 떠난 타지에서 한 부부가 살던 2층짜리 집에 세를 들어 살았다. 부부는 고양이를 길렀다. 푸른색, 유러피언 쇼트헤어였다. 내 성격과 완전 딴판인 사람 둘과 사는 게 쉽지는 않아 불화가 잦았다. 나는 꾹꾹 누른 마음을 고양이에게 풀었다. 서로 눈을 맞대며 사냥놀이를 했고, 내 엄지손가락을 물도록 가만히 놔두었고, 비가 오는 날이면 고양이를 들고 창문으로 가 비가 내리는 세계를 보여주었다. 그 고양이가 내 침실로 올라가는 계단 가운데에 앞발을 내리고 도도하게 앉아 있었다. 헤, 오랜만이다.


고양이가 항상 내 말에 따르지는 않았다. 왜 그러는지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고양이가 나와 다른 생명체라는 점은 고려하지 않았다. 너는 왜 내게 이러는 거니. 그때마다 벌을 주었다. 손에 물을 묻히고 얼굴에 탁 뿌렸다. 발을 받치지 않은 채 팔만 잡고 방을 배회했다. 꿈에서도 고양이는 내 말을 듣지 않았다. 고양이를 품에 안자, 곧바로 빠져나왔다. 나는 또 벌을 주었다. 내 손을 꼬리에 갖다 댔다. 고양이는 고통스러운 불협화음을 내고, 나에게서 도망가 내 방 침대 밑으로 숨었다. 고양이를 찾으려 몸을 굽히자 꿈이 산산이 부서졌다.


꿈에서 깨어나 씻으러 화장실 문을 열었다. 열심히 닦았던 타일 바닥이 붉은색인지 검은색인지 모를 피로 흥건했다. 하수구 위에 무수한 털이 뭉쳐 물이 내려가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었다. 놀라지 않았다. 맨손으로 털을 하나하나 끄집어냈다. 샤워기를 잡고 구석부터 피를 밀어냈다. 피 묻은 손으로 락스를 집고, 빡빡, 솔로 거칠게 바닥을 문질렀다. 회색 타일은 다시 회색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붉게 변한 타일 사이 틈은 아무리 닦아도 적황색으로만 바뀔 뿐 하얀 틈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어떤 기억, 내가 수치스러워하고 아파하는 어떤 기억은 쉽게 죽지 않는다. 완전히 닦아내려 해도 지워지지 않고, 바퀴벌레답게 질긴 목숨을 이어가며 다시 내 꿈으로 돌아와 애처롭게 운다. 그건 잊어야 해, 그렇게 말할 때마다 다시 돌아온다.


오늘도 도망치기로 했다. 눈물을 흘리며 피 묻은 손을 씻었다. 나는 이 피와 무관하다. 나는 이 피에 책임이 없다. 손톱 사이에 있던 핏덩이가 잘 닦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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