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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윤석 Aug 15. 2023

밑바닥에서 시작된 혁명

어느 진지한 뮤지컬 이야기 2

<헤어>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요? 앞에서 1960년대 사회를 간략하게 살펴봤다면, 이제 1960년대 뮤지컬 업계를 살펴볼 차례입니다. 


1960년대 브로드웨이 뮤지컬 업계에는 불황이 드리웠습니다. 세상이 바뀌었는데 그를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뮤지컬은 1940년대부터 20년 동안 황금기를 누렸습니다. 1950년대 엘비스 프레슬리가 로큰롤 음악을 열어젖히면서 관객이 조금 줄었지만 잘 버텼습니다. 황금기가 20년을 막 넘긴 시점인 1964년에는 <지붕 위의 바이올린(Fiddler on the Roof)>과 <헬로, 돌리!(Hello, Dolly!)>가 최고 인기 뮤지컬이었는데요. 바로 그해 미국 음악 시장은 비틀스를 위시한 영국 록 밴드로부터 공습을 당합니다. 록 음악이 패권을 쥐었습니다. 대중음악 트렌드와 브로드웨이 트렌드는 완전히 갈라졌어요. 황금기는 끝났습니다.


1968년은 록과 소울의 시대였습니다. 환각적 분위기를 제공한 사이키델릭 록(Psychedelic Rock), “샌프란시스코에서 머리에 꽃을 꽂고 함께 놀자”라고 말한 포크 록의 시대였습니다. 지미 헨드릭스와 재니스 조플린이 짙은 음악을 선보인 블루스, 여성과 흑인에 “R-E-S-P-E-C-T”를 요구한 소울의 시대였습니다. 히피 문화에 심취한 젊은 사람들이 음악을 소비했습니다. 브로드웨이 제작자들은 시대에 발맞추기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였어요. <헤어>가 올라왔던 1968년, 작품 50개 이상이 한 달을 넘기지 못하고 막을 내리고 말았습니다.


황금기가 끝나기 직전에 유행했던 <지붕 위의 바이올린(Fiddler on the Roof)>과 롤링 스톤스의 "(I Can't Get No) Satisfaction"을 번갈아 들어 보세요.


뮤지컬 <지붕 위의 바이올린> 중 "If I Were a Rich Man". 1965년 토니상 퍼포먼스.
롤링 스톤스의 "(I Can't Get No) Satisfaction"


나름의 변화를 시도하기는 했습니다. 1966년 초연한 <캬바레(Cabaret)>는 비선형적 서사 방식, 판타지적 연출, 축축한 분위기, 섹슈얼리티와 사회 문제를 무기로 브로드웨이에 혁신을 가져왔습니다. 다만 음악은 오케스트라 편성 그대로였죠. 결국 혁명은 당대 사회와 비슷하게 아래로부터 시도되었습니다. 1960년대 초까지 실험을 전개하던 무대였던 오프 브로드웨이가 상업성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기울어지자, 실망한 연극인들은 더 작고 더 실험적인 오프오프 브로드웨이 극장을 열기로 합니다. 이 실험극 운동과 퍼블릭 시어터가 <헤어>를 도왔습니다.


조셉 팝과 엘렌 스튜어트/Getty Images


연출가 엘렌 스튜어트(Ellen Stewart, 1919~2011)가 조직한 라마마 실험극단(La MaMa Experimental Theatre)은 즉흥적이고 자유로운 창작 활동으로 업계에서 유명했어요. 조셉 팝(Joseph Papp, 1921~1991)이라는 제작자도 있었습니다. 상업성에 구속되지 않은 좋은 작품을 발굴해 지원하고 저렴한 가격에 제공하겠다는 야망을 품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를 위해 1954년에 퍼블릭 시어터라는 극단을 창설하고, 1967년에는 정기적으로 작품을 유치할 수 있도록 같은 이름의 극장을 세웠습니다. 공사가 끝나가자 팝은 개막작을 물색합니다. 여기에 <헤어>가 걸려든 겁니다.


왼쪽부터 제롬 래그니, 갈트 맥더못, 제임스 레이도/Getty Images


작품의 틀을 짜고 가사를 쓴 제롬 래그니와 제임스 레이도는 30대 초반의 젊은 연극인이었어요. 오프 브로드웨이 공연에서 처음 만난 둘은 다른 음악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친구가 되었고 곧 새 뮤지컬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 방향은 1966년 라마마 극장에서 열린 <Viet Rock>이란 연극에 참여하면서 정립되었다고 해요. 베트남 전쟁을 주제로 한 로큰롤 뮤지컬을 만들기로 한 겁니다. 사회적 주제를 담은 브로드웨이 뮤지컬은 드물게 있었는데, 록 음악을 뮤지컬에 쓴 건 전례가 없었습니다.


둘은 뉴욕 이스트 빌리지에 살던 히피 커뮤니티에 주목해 스스로 히피가 되었습니다. 그 경험을 살려 가사를 완성했어요. 제목은 긴 머리에서 따 <헤어>라고 붙였습니다. 작곡가로는 재즈와 아프리카 음악을 공부한 갈트 맥더못을 섭외했습니다. 맥더못은 히피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었지만 로큰롤에는 관심이 있었고, 둘의 생각에 동의했습니다. 넘버 작곡을 마치는 데는 3주면 충분했습니다. 수많은 거절 끝에 팝에게 작품이 갔고, 그는 <헤어>를 개막작으로 낙점합니다.


시행착오 끝에 1967년 10월에 공연이 열렸습니다. 출연진에는 히피 커뮤니티에서 만난 사람들도 들어가 있었습니다. 언론이 그리 좋지 않은 평을 내놓았음에도 불구하고 관객이 몰렸어요. 이 반응을 본 마이클 버틀러(Michael Butler, 1926~2022)라는 제작자가 합류해, 인맥을 동원한 끝에 브로드웨이 공연을 성사시킵니다.


1967년 오리지널 오프 브로드웨이 캐스트. ⓒ Dagmar


브로드웨이에서 공연하게 되면서 <헤어>는 두 가지 칭호를 받았습니다. 오프 브로드웨이 공연을 거친 첫 번째 브로드웨이 뮤지컬. 록 음악을 전면에 내세운 첫 번째 브로드웨이 뮤지컬. 제작진은 넘버와 각본을 대거 수정하고 라마마 실험극단 출신 연출가 톰 오호건(Tom O'Horgan, 1924~2009)을 영입했습니다. 오호건은 자유, 즉흥성, 관객과의 조화를 강조하며 기존 연출의 방향을 크게 바꾸었어요. 마침내 1968년 4월 29일, 막이 올랐습니다. 브로드웨이 관객은 과연 어떤 내용을 보았을까요?




그 이야기는 두 번째 이야기, [<헤어>는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했을까요?]에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을 토대로, 작품과 1960년대 사회를 더욱 긴밀하게 들여다 보겠습니다.


[배경화면]

<헤어>의 두 창작자, (좌) 제임스 레이도 (우) 제롬 래그니 ⓒ Larry Ellis/Getty 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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