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는 무엇을 남겼을까요? 큰 성공을 남겼고, 사회와 뮤지컬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작품이 염원했던 것과 달리 바꾸지 못한 것도 있습니다. 하나씩 짚어보면서 이야기를 마무리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헤어>가 바꾸지 못한 것을 짚어봅니다. 세상은 <헤어>를 만든 사람들이 바라던 대로만 흘러가지 않았습니다.
1970년 5월 4일, 켄트 주립대 총격 사건을 담은 존 필로의 유명한 사진. 퓰리처상을 수상했다./Getty Images
작품의 근간인 히피 운동이 순식간에 가라앉았습니다. 1969년 8월 우드스톡 페스티벌에서 폭발하면서 기세를 높이는 듯했지만 1년이 되지 않아 자취를 감췄어요.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에도 등장하는 찰스 맨슨의 살인 행각이 있었고요, 롤링 스톤스 콘서트에서 질서 유지를 맡은 폭력배가 관중을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히피가 추구했던 평화와 동떨어진 혼돈이었죠.
정치 환경도 히피에 불리했습니다. 1968년에 미국에서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고 말씀드렸죠. 공화당의 리처드 닉슨이 전쟁 종식을 공약으로 내걸고 당선됐습니다. 닉슨 대통령은 베트남에서 철수하는 한편, 문제가 됐던 징병제를 모병제로 바꿨습니다. 그러면서 반전 운동은 동력을 잃기 시작했어요. 1970년 5월, 켄트 주립대에서 주방위군이 반전 시위대에 발포해 학생 4명이 사망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여론은 반전을 추구한 시위대가 아닌 혼란을 진압한 주방위군을 지지했습니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히피 세대는 나이를 먹었고, 주류 사회에 투항했습니다. 이제 히피가 현실에 미치는 영향력은 헤어 디자인과 패션 정도입니다.
1975년 4월 30일, 사이공의 함락
베트남 전쟁은 몇 년을 더 끌어 1975년에야 북베트남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미군은 5만 8천 명의 전사자를 냈습니다. 영화 <디어 헌터>, <람보>에서 묘사하는 것처럼 상당한 PTSD를 감수해야 했고요. 전쟁은 지금도 어디에선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예컨대 우크라이나가 있죠.
인종차별과 성차별 극복은 과거보단 낫지만 요원합니다. 미국은 2020년 조지 플로이드의 죽음을 계기로 전국에서 Black Lives Matter 운동이 일어났고, 동시에 문화 전쟁의 소재가 되어 국가가 분열하고 있습니다. 페미니즘은 인종과 개인의 차이를 발견하면서 넓어졌습니다. '제2물결'에 이어 '제3물결'이 나타났고요. 그러나 가부장제는 해체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교묘하거나 더 폭압적인 방식으로 여성과 소수자를 구속합니다. 제가 보기엔, 대한민국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헤어>는 차별에 대항했지만 역으로 성차별적 시선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른바 '누드 연출' 때문이었는데요. 연출자 톰 오호건은 "Where Do I Go?"가 끝난 뒤 모든 트라이브 멤버들이 옷을 벗고 관객을 가만히 응시하도록 연출했습니다. 자연과 자유를 강조하기 위한 의도였어요. 강제하지는 않았습니다. 옷을 벗는 건 오호건이 자주 사용하던 연출 기법이었고, 히피 문화가 받아들인 생활 방식이었어요. 가부장제로 돌아가는 사회에서는 아니었죠. 벗은 몸에 사회는 불쾌감을 감추지 않았지만, 한편으로는 관음증으로 작품을 봤습니다. 의도는 무시되고 이미지만 남았죠.
오호건은 웨스트엔드 개막 직전 BBC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BBC 리포트에 실린 영상을 1분 30초부터 확인해 보세요.
저는 누드 장면만 지나치게 관심을 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장면은 중요한 부분이 아닙니다. 정작 많은 언론에서는 작품의 핵심을 보도하지 않았습니다. 정상적인 것에 도전하는 일도 어떤 관객 분들에게는 놀라울 수 있는데 말입니다.
I think the famed nude scene has been greatly over-emphasized. It has very little importance in the show itself and much of the publicity has obscured the important aspect of the play which are also perhaps shocking to the people because they deal with the things the way they are, we tell it the way it is.
'누드'는 초연부터 현재까지 <헤어>를 설명할 때 자주 따라붙는 수식어입니다. 하지만 저는 누드가 작품의 본질이 아니며 과대 대표되어 있다고 봅니다. 성 혁명은 결국 가부장제가 원하던 방향과 가깝게 진행됐고요, 여성이 성적 욕망을 자유롭게 이야기하려면 아직도 불이익을 감수해야 합니다. '여자가 옷을 저렇게 입어서 성폭력을 당한 거다'란 주장이 아직 있을 정도니까요. <헤어>를 서술하며 누드 연출을 언급할 수는 있겠지만, 강조하는 것은 기만이라는 생각을 저는 지울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설명하고 싶지 않았어요.
이제 정리하겠습니다. <헤어>는 브로드웨이를 바꾸었습니다.
대중음악 트렌드와 사회 분위기를 신속하고 화려하게 흡수해, 열렬한 환호와 함께 성공했습니다.
음악과 내용 면에서 브로드웨이 뮤지컬이 발전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새로운 수익 모델을 만들었습니다.
히피 문화와 차별 철폐가 융합한 내용은 역사의 부침을 겪으면서 빛이 바랬지만 여전히 의미가 있습니다.
<코러스 라인>, <캣츠>, <렌트>, <헤드윅>, <애비뉴 큐>, <해밀턴>까지 이어지는 큰 흐름을 형성했습니다.
불과 백 년 남짓한 현대 브로드웨이 뮤지컬에도 시대가 나아갈 방향을 정의한 이정표들이 있었습니다. 1920~40년대 뮤지컬에 각본을 도입한 오스카 해머스타인 2세와 리처드 로저스, 1970~80년대 예술성을 극한으로 끌어올린 스티븐 손드하임과 다양한 장르의 혼합으로 대중에게 어필한 앤드류 로이드 웨버, 사회 문제를 해결하자고 외치며 록 뮤지컬을 부활시킨 1996년 <렌트>, 힙합 음악을 수용하고 인종 다양성을 역설한 2015년 <해밀턴>까지. 저는 <헤어>도 이 이정표에 당당하게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2020년대에 맞는 <헤어>가 나타났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합니다. '고전은 시대에 맞게 새롭게 번역되어야 한다'라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의 발간사처럼 말이죠. 50년이 흐르며 <헤어>가 얕게 고민했던 한 문제가 전면에 등장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단 한 넘버, "Air"에서 언급되었던 공기 오염 문제는 기후위기가 되어 많은 사람들을 위협하고 있죠.
(좌) 뮤지컬 <Six> 캐스트 ⓒ Liz Lauren (중) 뮤지컬 <리지> 캐스트 ⓒ 쇼노트 (우) 뮤지컬 <A Strange Loop> 출처 Playbill
<헤어>를 이끈 동력은 여전히 남아 있다고 느낍니다. 차별과 그 차별을 종식시키고자 하는 사람들의 분노와 열망입니다. 50년 동안 셀 수 없이 많은 뮤지컬이 나타났다 잊혔지만 꿋꿋이 살아남은 힘은 여기에서 나온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세상 모든 불의에 대항해 뚫고 올라오는 에너지에 열광하고 공감하기 때문이죠. 결점을 극복하고 새로운 내용을 담아, 달콤하지만 분노를 담아, "우리는 세상을 바꿔야 해. 가만히 있으면 바뀌지 않아!"라고 힘주어 말하는 뮤지컬을 보고 싶습니다.
함께 지켜보시죠. 지금까지 <헤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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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브런치북은 2020년 6월 브런치에 공개한 글 4편을 브런치북 형식에 맞춰 개작하고 2023년 8월 현황에 맞춰 업데이트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