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도 결국 인간관계잖아요.

서로에게 좋은 인간이 되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해.

by Yunus 유누스

1.

할머니에 이어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이제 다들 손주도 생겼는데 각자의 자녀, 손주와 명절을 보내는 것이 어떻겠냐고 고모부가 제안하셨다. 8촌도 가깝다고 하는 우리 가문에서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물음이, 우리 핏줄이 아닌 고모부를 통해 나온 것은 최씨 형제들에게는 꽤 도발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하지만 아빠의 단호함은 적막에게 틈을 허락하지 않았다. 아냐, 가족이라는 게 그런 게 아냐 문서방. 그래도 가족인데 계속 만나면서 얼굴을 봐야지. 작은 아버지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모부의 용기에 동의하던 나는 아쉬웠다. 몇 해 후 명절 준비 중 발생한 해프닝으로 나는 아빠와 절연하게 되었다.


2.

어느 집단이건 강제로 결속 당하는 것은 즐겁지 않다. 특히 가족이라는 집단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끈을 조이는 것은 이미 느슨함이 존재한다는 뜻이기 때문인데 대부분 윗세대에 의해 주도되는 결속은 느슨함의 원인을 정말 모르거나 모른 체한다. 핏줄이니까 뭉쳐야 한다는 구시대적인 무모함이 문제를 심화한다. 구시대라고 함은 부모님부터다. 3대는 이야기할 것도 없다. 부모와 형제자매를 묶는 것부터가 난제라는 뜻이다.


3.

가족은 20의 뜨거운 사랑이 80의 모든 증오를 이기는 -또는 10이 90을 이기는- 애愛 중심의 애증 관계이다. 핏줄이고, 부모는 자식에게 그래도 된다는 식의 일방적이면서도 배려를 상실한 언행은 사랑의 온도를 낮춘다. 반면 증오는 불붙은 날카로운 칼이 된다. 예의는 양방향 행동 양식이다. 공경을 앞세운 곱디고운 예禮가 부모 쪽으로 향하기를 희망하는 동안 자녀는 이탈을 소망한다. 시소는 한쪽으로만 기울다가 결국 자녀는 뛰어내린다. 남보다 못한 관계가 된다.


명절이 되면 유독 심하고 급박하게 기울던 시소는 현기증을 유발했다. 불필요한 움직임들로 더 좁아지는 공간, 내 오랜 가치관을 초라하게 만드는 걸러지지 않은 훈수, 하등 관심 없고 휘발만 되는 주제, 남발하는 자기주장. 시소에서 일어나고 싶었지만, 어른 공경을 강제하는 수많은 눈빛들이 어린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명절은 그다지 즐겁지 않았다.


4.

어린 시절 구축된 가족 간의 진실한 사랑의 교류, 진정으로 기뻤던 경험의 연속은 가족의 결속력을 유지하는 코어다. 이 코어는 자녀들이 성인이 된 이후에 발생하는 결핍이나 균열 극복에 도움이 된다. 반대로, 타이밍을 놓치면 가족 간 유대감의 경도는 낮아진다. 늦게라도 수습한다면 견고해질 확률이 어느 정도는 생긴다. 하지만 뭐든지 제 시기를 놓치면 쉽지가 않다. 열 살 자녀의 가치관은 물렁하지만, 20대가 지난 자녀의 가치관은 그렇지가 않다. 결혼한 서른, 자녀를 양육하는 마흔의 자녀는 말할 것도 없다. 언제나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예순, 칠순 부모의 고집이나 서른, 마흔 자녀의 고집이 추잡하기는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자녀(부모)가 부모(자녀)를 바꾸려는 시도, 자녀(부모) 스스로 변화하려는 시도, 모두 어렵다. 그래서 우리는 '당신이 그렇게 하면, 내가 그렇게 할게'라는 성사 불가능한 조건부 평화를 제안한다. 또는 '나는 이렇게 바뀌었는데, 너는 왜 그대로인가'라는 불균형하고 불만만 남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러나저러나 부모와 자녀는 서로를 탓하다가 금이 가고, 찌그러지거나 긁힌다. 앞서 말한 대로 코어가 강했더라면 회복이 빠르다. 그렇지 않다면 파멸을 향한다. 그러다 보니 차라리 거리를 두는 것이 얼마 남지 않은 호감을 지키는 방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연락이 뜸해진다. 만남은 어색하다. 불편하다. 불행하다. 남보다 못한 관계를 향한다.


사람과의 관계를 지속시키는 나의 여러 기준에 가족도 예외는 아니다. 가족에게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다시 말하지만, 우리 가족은 코어가 없다. 수습의 시도는 있었지만 역부족이었다. 친구, 동료, 지인들은 내 성격을 인정하고, 인간성을 칭찬하고, 능력을 존경해 주고, 예의를 지키며 날 웃겨주고 행복하게 한다. 또 만나야겠다는 희망이 생긴다. 반면, 부모님은 그렇지가 않다. 그러다가 남이 될까 봐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어떤 대화가 논쟁이 되었다가 '그러게 누가 낳아달래'라는 말을 뱉게 될까봐 말이다.


5.

내 부모님은 먹여살린다는 명분으로 부재했다. 나는 그늘에서 곰팡이 냄새를 맡으며 TV 리모컨이나 만지작거리고 어둠을 맞이했다. 모든 가족이 모여 웃는 일은 열 살이 넘으면 기대해서는 안 되는 줄 알았다. 오늘 학교에서 뭐가 힘들고 재미있었는지, 요즘 관심사는 무엇인지 등의 질문을 받을 수 있다는 것도 몰랐다. 기쁨이라는 감정을 찾아먹기 위해 사람들을 웃기기 바빴다. 스물 중반, 어떤 단체 사진에서 내 입꼬리만 축 처진 것을 발견한 친구의 놀림과 위로를 들었을 때 깨달았다. 나는 너무 어렸을 때부터 슬펐구나. 오랜 시간 분노가 침잠했구나. 이 모든 것을 숨길 수가 없구나. 유년 시절의 슬픔에 대한 책임을 누구한테 물을 수 있으며, 회복과 치유는 누구에게 탄원할 수 있을까.


6.

저온에서 제작된 자기를 집에 가서 백날 달궈봤자 소용없다. 제작 과정에서 고온에 달궈져야 의미가 있다. 그렇게 만들어진 자기는 균열을 예방한다. 가족은 그런 것이다. 내 부모님은 멋진 도자기를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튼튼하지는 않다. 내가 만드는, 우리가 만드는 도자기는 견고할 것이다.


세 줄 요약.

1 부모들은 명절 모임을 강요하지 말자. 다 같이 모이는 김에 모이자는 말도 하지 말자. 자녀가 싫어하는 분위기를 만들고 그 안으로 자꾸 자녀를 던져 넣지 말자. 던져놓고 방치하지 말자.

2 예의는 한 방향이 아니다.

3 자녀가 성인이 되기 전까지 사랑을 쏟고 진짜 행복만 맛보게 하자.

매거진의 이전글조진웅의 은퇴에 대한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