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아버지가 그랬다. 수상 ( 손 모양 )보다 족상( 발 모양 ), 족상보다 관상, 관상보다 심상이라고. 마음이 어떤지가 가장 중요하다는 말인데 나는 점쟁이 된 지금도 이 말 공감한다.
수상과 족상은 볼 일 없어 잘 모른다. 관상을 보다 보면 그 너머 심상이 보이는데 겉보기와 달라 놀랄 때가 많다. 얌전하고 순진하게 생겼는데 속에 언제 터질지 모를 시한폭탄을 안고 있다던가, 괄괄하니 성질깨나 부리게 생겼는데 속은 여리다던가. 여러분 알다시피 어찌 한 사람을 딱 떨어지는 한마디로 정의하겠는가. 손님이 겉과 속 다르게 보일 땐, 겉보기는 아닌데 속은 괄괄하네예 라고 할 게 아니다. 사람 속에는 두 가지가 들었다. 본성과 요즘 감정. 속에 든 게 본성인지, 그야말로 요즘 감정인지 잘 봐야 한다. 까다롭다. 사람은 그냥 봐서는 모른다. 저마다 말 못 할 본성이나 속 얘기 마음속에 하나씩 있다.
심상 얘기에 앞서, 관상은 과학이다 – 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이 유행처럼 돌만큼 사람들은 엇비슷하게 기분 나쁜 관상이 있는 듯하다. 관상은 과학이란 말은 수많은 검증을 요구하겠지만, 그저 관상만 놓고 본다면 중요한 건 사실이다. 관상에는 기분과 성격, 청결도 등이 고루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게 있다. 비슷한 생김새라면 영 다른 인생을 사는 건 심상 때문이다. 한 사람 인생을 결판 짓는 건 웬만큼 여기서 온다. 보통 사람들은 관상만 봐서 심상을 꿰뚫긴 힘들다. 심상은 어떤 순간에 볼 수 있다.
먼저 잘 될 때다. 흔히 배불렀을 때다. 혹자는 배부르면 배고팠던 시절을 잊는다. 작은 것에 감사했던 사람이 큰 것에 감사할 줄 모른다. 잘 돼서 변하는 사람은 잘 돼서 변한 게 아니라 원래 마음 약하고 줏대 없던 거다. 잘 안 됐을 때는 처지에 가려 본성이 드러나지 않았던 것뿐이다. 잘 돼도 여전한 사람은 마음이 강하고 확실하다. 돈에 혹하지 않고, 사람 인생 잘 됐으면 안 될 때 오고, 잘 됐으니 베풀어야 한다는 거 안다. 잘 안 됐을 때도 볼 수 있다. 잘 나갈 때 쳐다도 안 보던 사람이 한 번 망가지니 사정하고 돌아다닌다던가, 몽땅 자기 잘못이면서 비겁하게 탓할 곳 찾아다닌다던가 – 하는 경우다.
예시를 보면 감정에 사로잡혀 뒷일 생각하기 어려울 때 심상이 드러난다. 그렇다면 함께 위기 모면할 때, 여행 갔을 때도 심상 보기 좋을 것 같다. 함께 위기 모면할 때는 혼자 살고픈 마음에 사로잡힐 수 있고, 여행 갔을 때는 대접받고만 싶어 욕심에 사로잡힐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예외도 있을 것이다.
나는 심상 볼 때 먼저 눈동자를 본다. 안광이다. 눈빛이 어떤지, 맑은지 탁한지 본다. 뭐에 덮이지 않았는지, 무엇에 빠지지 않았는지도 눈동자에서 표 난다. 가만 보며 그의 심연으로 들어간다. 누구는 맑고 깨끗하고, 누구는 저만 아는 칼 한 자루 숨겨 놨고, 누구는 매 순간 부자 되는 상상 한다. 마음은 저마다 다른 형태로 살아 숨 쉰다. 생긴 건 차분하니 공부만 하게 생긴 사람이 사업가로 성공하는 거, 생긴 건 괄괄하니 못됐게 생긴 사람이 다른 사람 돕는 거, 전부 마음처럼 살아 그렇다. 어쩌면 심성은 하나씩 있는 비밀 무기 아닐까. 타인의 예상을 깨고 오직 너만이 다 설명할 수 있는 너로 살아가라는, 비밀 무기.
그래서 심상은 바뀔 수 없냐고? 바뀔 수 있다. 관상이 사는 버릇에 따라 바뀌듯 심상도 마찬가지다. 사람은 변한다. 나쁜 사람이 좋은 사람으로, 좋은 사람이 나쁜 사람 될 수도 있다. 그러니 각자 마음에 숨겨둔 비밀스러운 세상을 잘 닦아가길 바란다. 홀로 풍요롭지 말고 소박하더라도 함께 살아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