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왔다. 태풍이 불기 하루 전날 같은 날씨가 쭉 계속됐다. 햇볕은 뜨거웠다가 구름에 사라졌다를 반복했다. 비가 오지는 않았다. 덥고 시원하고 습하고 개운했다. 좋은 날씨였다. 자동차 창문을 남김없이 다 열고 바람과 뒤엉켜 운전했다. 언니, 날씨가 너무 좋아. 그런 얘길 여러 차례 하면서. 이런 날은 달이 바뀌면 못 만날 것이다. 기온은 더 오를 테고 비는 폭우처럼 오거나 내리지 않거나 둘 중 하나일 테니까. 있지. 완벽한 날씨만 되면 살아있는 게 감사하고 주변에 더 잘하자고 다짐하게 되잖아. 그게 참 이상하다. 어째서 좋은 날에만 그런 생각을 하는 걸까. 힘들어도 살아있는 게 감사하고 주변에도 잘하자고 다짐하면 안 되는 걸까. 어째서 사람은 자신에게 유리한 환경에나 감사해지냐는 거지.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이 얼마나 뻑뻑한 사람으로 보겠어. 가뜩이나 힘든 인생인데 좋게 좋게 생각하면 되지 – 하고. 근데 잘 안 되는 것 같다. 뭐든 꼬투리를 잡아야 성에 차니까. 오늘은 하고 싶은 말을 잔뜩 할 거야! - 라고 언니에게 말하면서 집에 왔건만 원래 쓰려던 말은 하나도 없다. 원래는 콩이 좋다. 두부가 좋다. 여름이 좋다. 뭐가 좋은 얘기만 하려고 했다. 역시 사람은 무턱대고 시작해봐야만 한다. 뭘 하든 생각지도 못한 게 나와버리니까. 그 생각지도 못한 게 본성일지도 모르겠다. 몸과 마음이 가는 대로 해낸 무엇.
며칠 전에는 친구들을 만났다. 우리 중 한 명이 서울에 간다고 해서. 각자의 성격이 다 달라서 다투고 멀어졌다가 또 만나고, 연락을 안 하다가도 힘든 일에는 만사를 제쳐두고 달려왔다. 서울로 가는 친구는 특히 그랬다. 아무리 멀리 있어도 비행기를 타고 왔으니까. 친구는 얼마 못 가 부산으로 돌아올 것이다. 빳빳한 서울 말씨 속에서 오래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부산 날씨가 너무 더워서 혹은 비가 자주 와서 서울로 잠시 도망칠 뿐이다. 다들 그렇게 믿고 있다. 누구나 자기에게 맞는 땅이 있다. 친구는 분명히 부산 사람이었다. 우리 중 그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우리 중 나이가 가장 많은 사람과 자주 싸웠다. 그는 자석의 양극처럼 가까이할수록 멀어지는 사람이었다. 이렇게 좋은 날씨에나 마음이 풍요로워지는 게 사람이라며 혀를 차는 게 나라면, 그런 나를 보면서 혀를 차는 사람이었다. 그와 여태 친구인 건 서로를 이해할 수 없어서가 아닐까. 쟤는 왜 저럴까- 하는 질문에 대답이 없어서. 서로가 서로에게 완성되지 않아서. 이해할 수 없음에 미련이 남아서.
인연이니 운명이니 하는 낯간지러운 얘기를 하고 싶지는 않다. 글로 적자면 낭만에 빠져 사는 사람처럼 보이니까. 우리 사이는 함께한 얘기만 적어도 된다. 낭만이라 쓰지 않아도 낭만인 줄 알 테니까. 낭만이 사라진 시대라고 했다. 글에도, 노랫말에도, 들리는 소문에도 까칠하고 텅 빈 얘기만 오고 가는. 우리는 다르게 살아야 한다. 시대는 앞서도 걸음이 느린 바보처럼, 알고도 모른 척하는 샌님처럼. 다시 다정한 시대가 올 것이다. 문장 한 줄에도 눈물짓고 사진 한 장에 위로받으며 더 다정해지기를 노력하는 시대가. 뻑뻑한 내 마음에도 여름이 왔다. 이 계절 내내 물을 머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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