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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통엔 하얀 띠

by 이윤우

여름 감기에 걸렸다. 열이 39도를 웃돌았다. 몸을 일으키면 머리를 깨뜨리는 통증이 몰려왔다. 머리를 움켜잡고 침대 위를 구르며 울었다. 어떻게든 이겨낼 거라고 이틀간 무식하게 굴다가 결국 병원에 갔다. 링거 주사 한 방에 온몸이 병원 침대 속으로 녹아드는 것 같았다. 진작 병원에 올걸. 괜한 고집을 부려서는. 열은 며칠간 오르내리며 기승을 부리다가 링거 주사를 한 번 더 맞고 나서야 숨을 죽였다. 딱 일주일을 누워 지냈다. 아픈 데는 장사가 없었다. 세상일은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다지만 아픈 건 아니라고 다시 한번 배웠다.


매일 동이 틀 때와 해가 질 무렵에 순자가 왔다. 순자는 이 동네에서 가장 부지런했다. 떡집을 십 년도 넘게 했으니까 순자의 부지런함엔 증거가 확실했다. 떡집은 다른 가게들보다 일찍 문을 열어야만 한다. 순자는 가게를 열기 전에 우리 집에 들러 머리를 만져줬고 밤에는 깨죽을 쒀서 왔다. 매일 새벽 4시에 집을 나서서 저녁 7시가 되어서야 집에 오는 순자가 우리 집에 들러 머리를 매만지고 깨죽을 갖다주려면 그 대단한 성실함을 조금 더 보태야 했고,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매일 해내는 걸 보면 병이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순자는 대단한 사람이었다. 감기가 다 낫고 보니 링거 주사나 병원 약보다 순자의 덕분에 나은 거라고 번쩍 생각나는 걸 보면. 애당초 혼자 이겨내겠다고 고집을 부리던 걸 병원에 보낸 것도 순자였다.


순자는 사람을 상대할 때 가면을 쓰지 않았다. 남들 다 마다하는 일을 하자면 억지웃음도 짓고 앞에서는 웃어도 뒤에서는 욕할 법도 한데 그럴 줄 몰랐다. 뭐든 하면 그만이라고 대충 잊어버렸다. 순자는 나이가 들수록 더 잘살 것 같았다. 쭈글쭈글하고 새까만 할머니가 되어도 친구가 많을 것 같았다. 살아있는 건 나이가 들수록 세상에서 지워지기 마련이건만 지금도 누구나 순자를 좋아하고 순자를 찾으니까. 순자는 근사한 어른이었다. 탄탄한 재력이나 거대한 배경보다 누구나 좋은 사람으로 기억하는 어른이 되는 게 더 어려운 법이다. 순자가 마다하지 않은 일만큼 순자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 것이다.


내가 순자 나이가 되었을 땐 두통이 심한 머리에 하얀 띠를 매주거나 깨죽을 쒀 오는 어른은 다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약은 더 좋아질 테니까. 순자의 처방은 제법 어리석고 무모하다는 얘기를 들을 것이다. 그래도 사람들은 새벽 4시에 일터에 나가도 아픈 사람에게 한 번 들렀다 가는 정성은 그리워할 것이다. 대체 가능한 신기술이 나날이 나타나도 제대로 된 어른의 한 방을 당해낼 수는 없을 테니까. 남을 생각하는 어른이 되는 건 큰 용기가 필요한 걸 사람들은 알까. 지위나 명성을 위한 욕심보다 함께 살아보겠다는 마음이 더 큰 부담을 요구한다는 걸. 근사한 어른이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가 다 같이 잘 되겠다는 욕심을 부리는 어른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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