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함을 씻어내기 위한 언젠가'
내 방 옆, 늘 드나드는 화장실.
그 안쪽, 샤워부스 구석에는
호스 걸이에 걸린 채 길게 늘어진 샤워기 호스가 있다.
스테인리스 줄은 축 늘어져 목이 꺾인 모습이고,
광택은 오래전에 잃어버린 듯
검은곰팡이가 군데군데 피어 있다.
샤워기와 연결된 호스의 목부분에선
물방울이 일정하지 않게 뚝뚝 떨어지고,
샤워기의 수압은 늘 어딘가 빠져나가는 듯 흐물흐물하다.
아마도, 5년….
대충 어림잡아
5년쯤 그렇게 지났을 것이다.
어느 날 샜고, 나는 그걸 알고도
“괜찮겠지” 하며 그냥 써왔다.
그보다 바빴고, 귀찮았고, 그냥 그러려니 하고 지나왔다.
불편함에 적응해 버린 걸까.
아니면 그저, 받아들여 버린 걸까.
고쳐야지 생각했던 날도 있었던 것 같은데,
그건 어느새 ‘내일’로 미뤄졌고,
그 내일들이 모여 5년이라는 시간이 되었다.
무뎌졌다고 해야 할까.
흐린 눈으로 사는 법을 배워버린 걸까.
샤워 호스를 볼 때마다
고쳐야 한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그건 익숙한 배경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쭈그려 머리를 감다가 정수리 끝에 닿는 낯선 시선에 문득 고개를 들었다.
늘 보던 그 자리, 샤워기 호스를 무심히 올려다본 순간—
나는 고정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표정 하나 없는 샤워기 대가리지만,
금속의 차가운 표면에 묻어있는 그 무표정함이 유난히 싸늘하고 낯설었다.
나를 향해 무심하게 휘어진 그 호스의 시선은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그건 단지 오래된 생활용품이 아니라
오랫동안 내가 애써 외면하고 있던 어떤 진실처럼 느껴졌다.
그 구도는 불쾌했다.
그동안 내가 괜찮다고 생각했던 것,
그저 무심히 지나쳐온 사소한 것들이
사실은 나를 지켜보고 있었던 걸까.
그것은 작은 경고처럼,
내가 눌러두고 살아온 감정의 바닥을
조용히, 그러나 정확하게 건드렸다.
애써 괜찮다고 넘겼던 일들,
‘지금은 아니야’ 하고 미뤄두었던 것들,
불편한데도 참고, 스스로를 설득해 온 시간들이
그 낡은 샤워기 하나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호스에서 새어 나오는 물처럼,
내 안에서도 무언가가 계속 새고 있었다는 것을.
작고 미세하지만, 분명히 멈추지 않는 무너짐.
그리고 그 무너짐은, 아무렇지 않게 계속 살아지는 일상 속에서 언제부터인가 당연한 게 되어 있었다.
고쳐야지, 언젠가는.
늘 마음속 어딘가엔 있었지만,
진짜 그 ‘언젠가’는 오지 않았다.
곰팡이는 스테인리스 결 사이사이 틈을 비집고 스멀스멀 피어났고,
호스 사이로 삐질삐질 새어 나오는 이음부,
지지대로도 못 버티고 축 처진 줄.
어딘가 지친 내 모습과 닮아 있다.
쉽게 고칠 수 있었지만 고치지 않았던 것.
지켜보며 무뎌져버린 것.
그러고도 살아지는 것.
버텨내는 것에만 익숙해진 마음,
익숙함이라는 이름 아래 방치되어 온 삶의 균열까지.
한심한 듯 내려다보는 그것을.
비로소 씻어내기 위해서라도.
‘고쳐야지, 언젠가는.’
익숙하다는 건,
이토록 아무렇지 않게 무너지는 일인지도 모른다.
잠깐 멈췄던 시선은
이내 다시 아래로 떨어졌다.
언제나처럼.
따가운 거품에 눈을 질끈 감고서,
“고쳐야지, 언젠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