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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자의 권리를 지키는 이름

누구의 해바라기인가: 저작권과 창작의 미래

by 하일하기싫어



‘해바라기’, ‘밤의 카페테라스’, ‘별이 빛나는 밤’.

이 강렬한 이미지들 앞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한 이름을 떠올린다.

빈센트 반 고흐,

대중의 기억 속에 선명히 남은 작가.

빈센트 반 고흐는 37년의 짧은 생애 동안 약 900점의 회화와 1,100점이 넘는 드로잉을 남겼다.

하지만 그가 살아있을 때 세상은 그의 작업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평생을 가난 속에 살았고, 그림 한 점을 팔았으며, 정신병원에서 고립된 채 붓을 들다 결국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지금의 명예와 알고 있는 예술사적 가치에 비하면 초라한 마무리였다.

예술적 평가와 경제적 보상 모두 그에게 너무 늦게 도착한 것이다.

고흐가 사망한 1890년, 그의 동생 테오 반 고흐는 6개월 뒤 뒤따라 세상을 떠난다.

당시 테오는 예술계 인사들과 활발히 교류하며 형의 그림을 알리기 위해 애썼고, 두 형제는 생전 수백 통의 편지를 주고받으며 예술관과 인생을 나눴다.

그 편지는 단순한 개인 기록을 넘어 고흐의 사상과 감정, 창작의 맥락을 보여주는 중요한 문헌으로 평가된다.

그 후 이 유산을 지킨 이는 테오의 아내 요하나 반 고흐 봉거였다.

그녀는 남편이 남긴 고흐의 작품과 편지들을 정리하고, 유럽 전역에서 전시회를 열며 고흐라는 이름을 세상에 알렸다.

당시 고흐의 그림은 대부분 무명 화가의 낯선 색채 실험으로 평가절하됐지만, 그녀는 그 가치를 포기하지 않았고, 수십 년에 걸쳐 그의 작품을 문화사적 자산으로 끌어올렸다.

이 일련의 과정은 예술사의 한 장면인 동시에, 창작물 보호의 필요성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고흐의 작품이 단지 화폭 위에서 끝났다면, 우리는 오늘날의 반 고흐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예술은 철저한 외면 속에서 만들어졌지만, 그의 유산은 누군가의 기록과 정리, 보존과 보호를 통해 살아남았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생긴다.

창작물은 완성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온전히 창작자의 것이라 할 수 있는가?

아니면, 그것이 어떻게 남겨지고, 누구의 손에서 지켜지며, 어디까지 또는 어떻게 살아가는가에 따라 비로소 가치가 증명되는 것인가?

저작권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제도다.

창작자가 남긴 저작물이 상업적 이용이나 무단 복제, 왜곡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도록 법적으로 권리를 보장한다.

단순히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창작의 맥락과 의미, 표현의 고유성을 지켜내는 구조다.

고흐의 예처럼, 창작자는 종종 생애 동안 자신의 작업이 이해받지 못하는 시기를 감내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저작권은 단지 ‘법’이 아니라, 그들의 열정과 노력, 실패와 외로움을 지켜주는 최소한의 울타리다. 그 울타리가 없다면, 우리는 수많은 예술과 창작의 가능성을 잃게 된다.


현재 우리는 창작물의 대홍수 속에 살고 있다.

지구 반대편 누군가의 이야기, 일상, 작품까지 셀 수 없이 많은 창작물이 다양한 플랫폼을 통해 유통되고 있다.

쏟아져 나온 창작물은 계속해서 누군가에 의해 쓰이고, 다듬어지고, 다시 엮이며 복제되고 있다.

저작권이라는 보호 장치가 이 흐름을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그 속도는 매우 빠르다.

이제는 온전한 보호 자체가 가능한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될 정도다.

창작과 예술의 경계는 이미 허물어졌다.

정리되지 못한 결과물들은 서로 뒤섞이고, 흩어지기를 반복하며, 덕지덕지 서로에게 흔적을 남겼다.

누가 주인이고, 시작인지 찾을 수 없고 그 의미는 중요치 않다. 결과만 소비할 뿐, 서로가 서로를 쫒기 바쁘고, 더 빨리 트렌드를 리드할지에 혈안이 되어 있다.

이 겹겹의 흔적은 창작과 아이디어의 기폭제인지.

예술의 발전과 인류 문화의 대부흥기를 예고하는 신호인지.

단지 무분별하게 쓰이고 책임감 없이 버려지는 일회용품 쓰레기와 같은 결과물의 찌꺼기인지.

우리는 지금 그 갈림길 위에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기존의 저작권 제도는 이 새로운 흐름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

불편한 진실이지만 이미 관리 영역의 한계점을 지났다.

기술은 너무 빠르게 진화했고, AI는 창작의 주체로까지 등장했다.

기존의 틀과 방식으로는 더 이상 창작물과 예술을 충분히 보호하거나 조율하기 어렵다.

법 이상의 기능을 했던 최소한의 울타리는 그 기능을 상실했다.


AI는 거대한 데이터 값 위에서 작동하고 있다.

수많은 과거의 자료를 분석하고 조합해 단 몇 분, 몇 초 만에 새로운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지금 이 순간에도 셀 수 없이 많은 창작물이 쏟아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생성된 창작물의 저작권은 누구에게 속하는가?

명령한 인간에게 있는가, 아니면 AI 자체에게 있는가?

이 결과물은 단순한 모방에 불과한가,

아니면 과거의 유산을 토대로 재해석된 새로운 창조물인가?

누구도 정답을 확신할 수 없는 혼란의 시대를 통과하고 있다.

너무 급격히 열린 미래의 문턱 앞에서, 모두가 당황스러울 따름이다.


더 강력한 법과 제도로 저작권의 영역을 강화하고 제한 및 통제할 것인가,

아니면 창작의 다양성과 자유로움을 지켜내는 윤활제로써 영역과 역할을 재정립할 것인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표현의 자유와 창작의 공유를 위협하지 않도록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
저작물은 보호하되, 나눌 수 있어야 하며, 존중받되, 새로운 창작의 씨앗이 되도록 해야 한다.

저작권은 경험해보지 못한 시대 앞에서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다.

지금도 누군가는 빈센트 반 고흐의 해바라기를 그리고 있다.

그대로 모사하거나, 변형하거나,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재해석되며,

그렇게 해바라기는 끊임없이 되살아나고 있다.




미래의 우리는 과연 그 수많은 해바라기들 속에서,

처음 그것을 그린 사람이 누구였는지 끝까지 기억할 수 있을까.

그땐 어떤 해바라기가 진짜라고 말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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