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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엽여비소엽 Nov 20. 2015

짚어보기



※이번 주제는 글이 좀 깁니다. 









모든 감정은 양면성을 띄기 마련이다.


안전한 것은 반대로 위험하고, 아름다운 것은 반대로 추하며,


간단한 것은 오히려 복잡하다.




기쁨의 반대는 슬픔이다. 이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다.


모든 것은 양면성을 띄기에, 기쁨을 추구하는 것은 슬픔을 추구하는 것과 같다.


기쁨을 책임지려면 슬픔에 대한 책임감도 있어야 하고,


이 둘은 분리하고 싶어도 분리되지 않는 존재다.




삶을 살아가는데 수많은 난관과 경험들이 우릴 이 둘로부터 보호해주기도 한다.


때론 더 강한 기쁨과 슬픔이 그보다 약한 감정들을 무마시켜주기도 하고,


그들이 불러내어진 경험은 또 다른 교훈을 전달해주기도 한다.




슬픔과 기쁨으로 비롯된 그 어떤 결과도 나 이외의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다.


슬픔이 만들어낼 의존성이나 불안, 걱정이 피해를 초래할지언정, 


슬픔 자체는 오히려 우리를 성장시켜주는 발 디딤판이 되어준다.




하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 우리가 가까이하지 말아야 할게 있다.


그것은 바로 '웃음'.


의아할 것이다. 행복이 외적으로 드러나는 상식적인 상징인  '웃음'을 멀리해야 한다니?




의아해할 당신에게 묻는다.


웃음의 반대가 무엇인지 아는가?








웃음도 그 자체론 우릴 '기쁨'과 비슷한 상태로 만들어준다.


정확히 말해선 웃음은 '활성화' 고,  '자극'이며,  '흥분'이다.


또한 대화에 있어서, 웃음은 '수용'의 의미를 띠기도 한다.




그럼 웃음의 반대는 뭘까?


웃음이 활성화고, 자극이며, 흥분이고, 수용이라면,


반대론 정체되고, 무료하며, 우울하고, 배타적인 것인가?




비슷하지만, 놓쳐선 안될 결정적인 포인트가 하나 있다. 웃음이란 것이 갖는 '내뿜는 에너지'.


반대의 경우에도 이것은 변하지 않는다.


정체된 생각과, 무료한 결론이, 우울하고 배타적으로 남에게 뿜어져 나오는 것.


웃음의 반대는 '분노' 일지도 모른다.








분노는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다치게 한다.


때때로 분노가 필요한 상황이 있다라고들 하지만,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이기적인 방편일 뿐이다.


아니, 애초에 분노할 상황에 자신을 내몰아둔 자신의 탓이기도 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하려면, 우린 애초에 그 상황에서 분노할 이유가 없어야 한다.




가끔은 우린 우리를 지키기 위해 분노를 쓰기도 한다.


주로 부당한 대우를 받던가, 상황을 타계하기 위한 판 뒤집기 정도의 숨겨둔 수로써 사용한다.


분노는 상상을 초월하는 힘을 가지고 있어서, 뿜어내는 자신조차 주체하기 어려우며,


주변에 대상이 아닌 사람들까지도 분노가 뿜어내는 안 좋은 기운에 휩싸이게 한다.




그렇기에 분노가 초래하는 직접적인 결과는 모두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상대의 의견을 꺾어 누르거나, 단지 이 상황을 회피하기 위해서, 내가 나를 더 강한 자 아임을 내보이기 위해


뿜어내는 그 힘은, 어떤 상황을 옳게 바꾸기 위한 노력이 아닌,


단지 자신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투정을 보이고 있는 것뿐일지도 모른다.




누군가 분노할 때, 평범한 사람들은 누구나 기뻐하지도, 슬퍼하지도 않는다.


그 분노의 명분에 공감가서가 아닌, 분노 자체에 대한 반응으로 저 둘은 적절하지 않다.


하지만 웃음은?


우린 누군가 분노할 때 웃음으로 그 상황을 무마하려고 하기도 한다.


마치 별것 아닌 일이기에, 대상이 그 정도까지 화를 낼 필요가 없다고 말하려는 것처럼.


누구에게도 그러한 대처를 배운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행동하게 되는 건,


그것이 자연스러운 행동이기 때문이다.







웃음을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웃음의 반대 개념인 '분노' 가 내포되어있기 때문과,


웃음 그 자체도 자신을 통제할 수 없는 상황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멀리하라는 것이 완벽히 기피하라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것을 추구키 위해 에너지를 너무 많이 쓰지 말라는 것일 뿐.


웃음이 많은 사람은 잠재된 분노가 많은 사람이 많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도덕의식과 윤리의식이,


사회적으로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형태로써 분노를 승화시켜 표현하는 것이다.


이러한 올바른 방어기제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문제가 없지만,


때때로 웃음이 그 사람 자체의 본질이 되어버려 자신의 모습조차 잃은 채,


의미 없는 상처를 되풀이하고 풀리지 않는 분노를 삼키는 사람이 있다.




감정을 승화시켜 표현하는 것은 간접적인 것일 뿐 완벽히 표현 욕구가 사라져 평온 해질 순 없다.


술자리든 진솔한 자리에서 이들이 내비쳐주는 위화감 드는 모습들은,


평소와 그 당시에 굳이 '진짜 모습' 같은 수식어를 붙일 필요도 없이 그저 이 사람의 본모습 자체인 것.




웃음과 분노는 다른 감정들보다도 강한 힘을 가지고 있기에,


이것이 뿜어내는 폭풍 같은 에너지에 휩쓸리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행복을 구하기 위해 그 폭풍을 일궈내는 사람을 멀리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을 이해하기 위한 방편으로 그들을 따라 하거나 비슷해지려는 것은 행복과 멀어지는 지름길일지도 모른다.


사람은 각각의 행동 패턴이 있기 마련이고, 분야별로 소진 가능한 에너지의 양도 다른데,


이런 차이를 묵과한 채 그저 살아왔던 방식대로 그들, 혹은 나를 이해하려는 사람이 있다.


이것은 서로에게 불편한 일이 아닐까?








모든 사람들은 존중받아 마땅하다.


서로가 서로의 패턴을 이해해주고, 때론 맞춰가며, 그 속에서 우린 끊임없는 내&외적 변화를 거듭해나가야 한다.




짚어보기가 언제나 그랬듯, 모든 변화의 초점은 자신으로부터 비롯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모두가 분노와 웃음이 뿜는 그 강렬한 힘에 휩싸여 자신의 중심을 잃지 않았으면...





행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웃음과 분노는 독이 될지도 모른다.


모든 감정이 그렇지만, 극으로 치닫는 상황엔 특히 이 둘은 더 위험하기때문.


짜릿한 자극은 우리의 눈을 흐리게 하고, 귀를 탁하게 하기도 한다.


웃음 같은 긍정적인 힘을 주변 사람을 위해 사용할 때가 필요하긴 하지만,


자신에겐 단지 진실을 피하기 위한 눈가리개 이상의 의미는 없다.


모든 진실과 사실은 온전히 받아들였을 때 비로소 나의 것이 되고 흡수되는 것.


상처와 혼란이 있다면 피하지 말고 똑바로 응시하라.


커 보이고 위협적이었던 녀석들의 모습도 일렁이던 잔상 없인 그저 초라한 감정일 뿐이니까.




모든 사람들은 행복해질 권리가 있다.


그리고 그 어떤 행복도 전부 자신의 마음에서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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