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하지도 평범하지도 않은, 조용하게 별난 대학원생의 85일간의 제주산책
규모에 맞는 삶
나는 늘 가까운 학교를 다니고 싶어 했다. 초등학교는 비교적 가까웠지만 집 바로 앞이 학교인 친구들이 부러웠고 중학교는 걸어서 20분이 걸렸다. 그래서 엄마가 새 집 5분 거리에 고등학교가 있다고 했을 때 무척 기뻤다. 편하게 학교에 다니는 꿈에 부풀었었다. 하지만 웬 걸, 그 학교는 남고였고 나는 또 20분은 족히 걸어야 하는 거리에 있는 고등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근처 여고에 배정되었다면 더 멀었을 것이다. 근처에 대형마트가 있어 좋다는 말이 뚜벅이를 고려하지 않은 말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의 배신감은 그때와 비슷했고, 동네 마트에 가려고 하니 그조차 15분은 걸어야 하는 곳에 있어서 배신감이 배가 되었다. 그래도 믿고 찾아간 동네 마트가 정말 '동네' 마트라는 말처럼 작아서 고작 과자 하나만 덜렁 사들고 나올 수밖에 없었을 때의 그 배신감이란. 반복되는 배신감에 편한 장보기는 글렀구나, 싶었다.
그러나 헤매듯 낯선 골목을 지나 해안가로 돌아가는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친구들 덕에 배신감이 옅어졌다. 얼굴이 비슷비슷한 커다란 개들이 꽤 많았고 자유롭게 나다니고 있었다. 그들은 나를 무서워하거나 경계하지 않았고 위협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반가워하거나 시큰둥하게 지나쳤다. 인도와 차도가 불명확하게 구분되어 있거나 지나치게 좁은 골목골목은 복잡하게 얽혀 있기도 해서 초행길에 잘 찾아가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만큼 차도 쉽게 돌아다닐 수 없는 길이다 보니 사람은 좀 불편해도 커다란 개들은 편하고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좁고 복잡한 길도, 다소 먼 마트들도 그러려니 싶어졌다. 아주 작은 마트조차 이 마을에는 어울리는 듯했다. 약간 부족하고 불편해도 여긴 또 여기만의 규모에 맞는 삶의 방식이 있다. 내가 적응하면 될 일이다.
바다 아래 녹지대
아침저녁으로 산책을 하고 저녁엔 멀리 마트까지 다녀오게 된 건 우연이었다. 아직도 등과 어깨가 찌뿌둥해서 아침에 쉬려고 했었는데 창밖에 남다른 빛무리가 보이는 바람에 나갈 수밖에 없었다. 막상 나가보니 역시 좋기도 해서 정처 없이 걷고 또 걸었다.
신기한 건 어제까지 몰아치던 파도가 잦아들었고, 멀어진 파도 소리와 달리 바람은 더 세졌고, 바다였던 곳이 바닥을 드러내며 검은 바윗길이 되었고, 갑자기 신비로운 녹빛으로 뒤덮인 바위들이 눈에 들어왔다는 점이다. 그때까지는 갑자기 저 녹빛이 어디서 나타났는지 눈치 채지 못하고 어리둥절해했었다. 감탄하면서도 바보처럼 몰랐다. 그러다 저녁 산책을 나섰다가 문득 깨달았다. 아침에 내 감각을 사로잡았던 모든 것들이 사실 이어져 있다는 것을, 변화였다는 것을.
당연하게도 밀물과 썰물 때문이었다. 썰물 때라 바다와 나의 거리가 멀어졌기에, 검은 바위로 이루어진 경계지대가 넓어졌기에 바람의 세기와 무관하게 파도 소리는 아득해졌던 것이다. 그렇게 드러난 검은 바위를 물들인 녹빛의 생태계. 이끼 낀 바위들은 이때껏 본 적이 없는 전혀 새로운 풍경을 보여주었다. 바위틈에 고인 물들이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났다.
같은 곳을 거닐었는데도 매일매일이 새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