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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현 Oct 11. 2022

67-70일 차 : 꽃 사진의 이유, 완주-발 디딤

새울음,공기 샤워,세계의 끝,섬에서 섬으로,잠꼬대,괜찮은 처음,가끔은함께

67일 차


새 울음


해안에서 산길로 들어가는 길목 옆에 꽤 넓은 공터가 있다. 전선에 가려지지 않은 한라산을 볼 수 있는 곳이다. 풀숲에서 생명을 찾는 건 쉽지 않지만 새 울음소리는 쉼 없이 들려와서 귀를 기울이게 된다. 보이는 것보다 들리는 것이 공간을 채우는 데 유리하다. 그래서 새들은 보이지 않으면서도 이 공터의 주인처럼 느껴진다.


어느 새의 울음소리는 호호호호호휘하. 특이하다. 약간 헝거게임 시리즈의 모킹제이를 연상시킨다. 하지만 내 휘파람을 따라 하지는 않더라. 공터를 바라보며 특이한 지저귐을 듣고 있자니 오히려 사위가 고요해진다. 바람만이 쓸쓸히 뺨을 스치고 시간이 멈춘 세상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한 기분이 된다. 누구인지 모를 어떤 이를 기다리고 또 기다리다가 뒤돌아 서자 바람이 온몸을 휘감듯이 불어오고 시간이 다시 흐른다. 귓가엔 기이한 새 울음이 스친다.



꽃 사진의 이유


어릴 때는 온 세상이 반짝거렸는데 그 반짝임이 맑은 눈에만 계속 보이는 건 줄 모르고 당연히 여겼다. 그리고 잊었다.

사춘기 때는 세상이 갑갑한 암흑천지 같았다. 내가 그다지 반짝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눈을 가릴 만큼 아파서 그랬을 거다.

학부 때는 다시 빛나 보려고 애썼지만 열등감 속에서 나 빼고 모든 것이 빛나 보였다.

너무 밝은 빛들은 그냥 하얗게 번지기만 해 다른 의미로 눈앞을 가린다. 빛나지 않는 나는 하얀 도화지 위에 실수로 찍힌 점을 지우듯이 지워지고 또 지워졌다.


그 후 많은 이야기와 눈물과 다독임을 지나 침침한 시야로나마 작고 반짝이는 것들을 다시 발견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였다. 길을 가다가 하늘을 보고, 나무를 보고, 잔디를 보고 사진을 찍기 시작한 것은.


반짝이는 것들을 사진에 잔뜩 담고 싶었다. 어릴 적 맑은 눈동자에 비치던 반짝이기만 하는 세상은 이제 없지만 그때의 반짝임을 순간순간 발견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거나 또는 그럴 여유가 필요해지는 때가 오면 우리는 꽃 사진을 찍게 되는 걸까. 부모님들 사진첩에 풍경 사진이 가득한 이유를 조금쯤 알 것 같다. 걸음이 조금씩 느려지는 이유도.



완주 : 발 디딤



2/11~4/11.

딱 두 달만에 8주 도전을 완료했다 일주일 서울 가서 쉬었고 딱 한 회차 뛰다가 그만뒀었다. 이제 내 생일은 4월이기도 하다. 다시 태어난 기분. 약간 토하면서 30분을 어떻게 뛰어? 했던 첫 달리기 때는 상상도 못 했는데 내가 진짜 30분을 쉬지 않고 뛸 줄이야. 퉁퉁 부어오른 발이 너무 뜨겁다. 내가 땅을 딛고 서있구나. 태어나 처음으로 나도 이 땅에 발을 디디고 있다고 느꼈다. 그곳이 섬이라니, 설문대할망이 첫 발을 디뎠던 땅이라니 놀랍고 뜻깊다.

그동안 그만두거나 포기해도 되는 이유는 끝도 없이 많았다. 잠깐 민망하면 이 도전은 없던 게 될 것이었다. 그런데 온몸이 힘들다고 그만두자고 할 때도 마음만은 끝까지 해내고 싶다고만 말해서 마음은 그 하나뿐이라서 끝까지 했다. 비가 온다고 해서 마지막 도전이 미뤄질까 봐 충동적으로 오늘 나왔는데 정말로 해버렸다. 와 이게 되네의 연속이었던 런데이...


이제 선생님한테 메일을 보낼 생각이다. 저 잘했죠? 저 진짜 잘했어요. 그렇게 물어놓고선 내가 대답해버릴 거다. 중요한 건 스스로의 인정이기에.




68일 차


공기 샤워


어제 뛰지 않았다면 영영 마지막 달리기를 못했을 것 같다. 어제부터 쌓인 습기가 새벽에 범섬을 습격해 삼켜버렸고, 하늘과 바다 사이가 물안개로 메워졌다. 이를 어쩌나, 하고 중얼거리며 40분을 걸어 버스터미널에 왔는데 중산간 쪽 방향만 기이하게 하늘이 맑고 푸르렀다. 그리고 습했다. 그냥 걷기만 했는데 온몸이 젖었다. 공기 속에서 샤워를 한다며 이런 느낌일까.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그늘에 서니 바람이 시원해 기분이 좋다. 땀은 계속 나서 마스크를 찢어버리고 싶다.



세계의 끝 - 여자 친구는 없지만


중산간 지방을 제외한 해안가가 모두 해무로 뒤덮였다. 마을에서 내려 모슬포항으로 걸어가는 길은 온통 회색빛이었고 시야는 좁았다. 안개 너머에 있는 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멸망한 세계의 끝에 도달한다면 이런 풍경일 것 같았다. 터만 남은 무수연대에 불이 올랐던 시대에도 해무가 끼면 모두 멈춰버렸다고 했다. 누군가가 직접 불이 되어 다른 해안을 향해 달리고 또 달려야 했다고.


여러 가지 상상을 하며 읽었던 소설 『더 로드(The Road)』의 한 장면 같다. 무언가 있으리라 기대하며 혹은 기대하지 않으나 별 수 없어서 걷고 또 걸었지만 도착한 세계의 끝이, 바다가 죽은 듯이 고요해 말을 잃는 어떤 순간. 바다 너머에도 아무것도 없을 것 같다. 안개만 자욱하다. 안개는 끝이고 모든 걸 삼킨다. 끝을 가려주는 병풍 같은 것. 우리는 끝을 알 수도 없고 알아서도 안 되기에 안개가 끼는 것인지.


우리가 땅에 발 붙이고 사는 동물이라 그런지 세계의 끝은 왜인지 바다여야 할 것 같아 금붕어를 데리고 바다로 향하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상상한 적이 있었다. 피난을 가는 사람들이 키우던 반려동물들은 어떻게 되는 걸까, 라는 고민에서부터 시작된 허무맹랑한 이야기였다.


개나 고양이, 가축은 네 다리로 어딘가 가려고 해 볼 수도 있겠지만 물에 사는 물살이(물고기)는 어떻게 하지? 그래서 주인공은 키우던 금붕어가 사는 수조를 어깨에 메고 길을 떠난다. 멀리, 멀리. 이 금붕어가 어떤 종인지, 태어난 고향이 어디인지, 어떤 기후와 어떤 물에서 살 수 있는지 아무것도 모르지만 그저 바다로 그를 데려가야 할 것 같다. 그래서 주인공은 땅끝이자 바닷가인 어딘가를 향해 그냥 걷고 또 걷는다. 사실 방향을 알지도 못하는데 그냥 걷다가 당도하는 어느 바다에 금붕어를 풀어주고자 하는 주인공의 걸음과 목표는 맹목적이다. 결과조차 생각하지 않는 그의 걸음은 오직 생명의 무게만을 짊어지고 있다. 이유나 결과는 사실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그가 금붕어를 버리지 않았고 할 수 있는 일을 했다는 것뿐이다. 사람들은 힘든 피난길에 생필품도 아닌 수조를 지고 가는 주인공을 신기하게 보거나, 미련하게 보거나, 미쳤다고 여긴다. 주인공은 바다에 닿을 수 있을까?


과학적인 이유로 수조를 가지고 긴 시간을 이동하는 건 너무 불가능하므로, 너무 많은 의문을 불러일으키거나 너무 많은 미래과학기술적 설명을 요하는 설정이므로 소설이 되긴 어려울 것 같은 이야기다. 아무튼 세계의 끝은 존재하고 바다여야 하며 희망이나 여자 친구나 그런 것들을 확신하는 건 소용없는 일이어야 한다.


끝은 공허하나 아름답다. 꺼져가는 불씨가 되어 안갯속을 더듬으며 향하는 곳이기 때문에.




섬에서 섬으로


해무를 뚫고 섬에서 섬으로 향했다. 유배지로도 유명했던 제주도에 유배된 사람들의 절반은 이송되는 여로에서 풍랑을 만나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지금도 배로는 열두 시간이 꼬박 걸린다던데, 그 옛날에는 몇 주, 몇 달이 걸렸을 길이다. 그 먼 바닷길을 나무배로 어떻게 건넜을까? 목숨을 건 여정을 반복하는 일을 업으로 삼은 선장과 선원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납작한 섬인 가파도를 걸으면서 보리밭과 유채꽃밭을 구경하고 돌하르방에 안겨 보기도 했다. 어떤 돌하르방은 악수를 청하고 있길래 기쁘게 그 악수에 응했다. 그렇게 작고 아름다운 청보리의 섬을 둘러보고 다시 큰 섬으로 돌아가는 길, 맞은편 배를 향해 손을 흔들자 그쪽에서도 손을 흔들어 인사를 돌려주었다.


조금 걷히는가 싶던 해무는 잦아들지 않았다. 저녁을 먹고 어두워진 도로를 따라 제주시에서 서귀포시의 끝으로 향하는 길, 직접 암흑천지를 경험할 수 있었다. 가로등 불빛도, 신호등도, 앞서 가는 차의 불빛도 안개로 인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 안개에 먹혀 사라지는 걸까, 우리도 안갯속을 걷다 보니 지구 반대편이나 먼 과거, 먼 미래에 서 있었다는 기담의 주인공이 되는 걸까. 두려워하며 신기해하며 오래도록 달렸고 우리는 마침내 안개를 넘었다.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생각했다. 자연은 우리를 위험에 빠트리고 살아남도록 함으로써 죽음을, 그리고 살아있음을 잊지 않게끔 이끄는 무서운 스승이다.





69일 차


잠꼬대


어제 너무 피곤한 하루를 보낸 터라 푹 잘 줄 알았다. 그런데 습관이라는 게 뭔지, 아니면 증상인 것인지, 아주 이른 새벽에 눈을 떴고 다시 잠들지 못했다.


옆자리에는 나와 달리 순식간에 잠들 수 있는 초능력자가 잠들어 있었는데 잘 자다가 한숨을 쉬듯이 잠꼬대를 하기에 웃음이 터졌다. 한두 마디 더 하길래 계속 웃었더니 그도 꿈 밖으로 잠시 나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흘리며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느냐고 묻더라. 꿈에서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잠꼬대에 대한 대화가 잠시 오갔는데 대화를 하다 말고 그는 다시 눈을 감고 꿈속으로 사라졌다. 그런 일이 서너 번 반복되었고 우리는 매번 웃었고 매번 빠르게 헤어졌다.


같은 하루를 보냈는데 왜 누구는 잠들고 누구는 잠들지 못하는지. 하지만 결국은 이른 아침부터 움직이는 나 때문에 우리는 모두 여행에 어울리지 않는 이른 시간에 일어나 하루를 시작했다. 폭풍 전야처럼 고요하다 못해 청명한 하늘과 베갯잇에서 터져 나온 솜뭉치 같은 구름 아래 산책을 하고 서로의 모습을 남겨주기도 했다. 노란색을 좋아하는 나는 동행이 가져온 노란 필름 카메라를 내 것처럼 들고 다니며 소품으로 썼다.


우리는 종일 잊을만하면 잠꼬대 얘기를 꺼내면서 웃고 떠들었다.



괜찮은 처음

여기 와서 첫 경험을 많이 하고 있다. 오늘은 태어나 처음으로 디저트를 먹고 '너무' 맛있다는 말의 의미를 통감했다. 왜 우리가 좋은 일에 '너무'라는 부정적 의미의 부사를 쓰는지 의아했는데 과할 정도로 맛있는 음식을 먹으니 알 것 같았다. 이 맛을 잊고 싶지가 않고 서울로 돌아가면 먹을 수 없다는 사실이 아쉬울 정도였다. 그야말로 '너무' 맛있어서 기쁘고도 울적했다. 카페는 예뻤고 위치도 좋았고 창밖으로는 머리가 구름에 가려 현묘한 분위기를 내는 섶섬과 아름다운 바다가 보였다.


이 카페와 인절미 팥빙수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꼭 추천하고 싶고 꼭 데려가고 싶었다. 차가 없어서 혼자서는 갈 수 없을 것 같아 아쉬워했는데 좀 떨어진 정류장을 기준으로 버스를 찾아봤더니 조금 시간을 들이고 많이 걸으면 다시 올 수 있을 듯하다. 다음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놓였다.



무엇이든 처음이란 놀랍고 재미있다. 새로운 자극과 변화가 힘들고 아프기만 했던 날들이 있었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다.



70일 차


가끔은 함께

내성적인 것과 내향적인 것은 쉽게 동일시되거나 오인되곤 한다. 내향형의 가장 큰 특징은 사람을 만날 때 아주 빠르게 에너지가 고갈된다는 데 있다. 이건 사람을 싫어하거나 낯 가리는 것과는 또 다른 문제다. 누군가와 같은 공간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어떨 때는 문자를 주고받는 것만으로도 기가 빨리고 지치곤 한다. 나는 지극히 내향적인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자극이 차단된 사적인 공간에서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좋아하고 함께 여행하는 것도 좋아한다. 특히 좋아하는 순간은 번잡한 하루를 끝내고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는 고요한 밤. 그 밤에 함께 노래를 듣거나 영화를 보거나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거나 하는 일은 즐겁다. 가끔은 안 하던 야식 먹기 같은 일탈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한동안 혼자 지냈다 보니 누군가가 내 부엌에서 과일을 씻고 설거지를 하고 그런 모습이 너무나 생소했다. 식당에 가거나 카페에 가거나 누가 해주는 음식을 먹는 일도 그랬다. 불면증이 치료된 건가 싶을 정도로 낮잠을 많이 잤던 이틀을 맛있는 카나페로 마무리하면서 내일 돌아가는구나, 조금 아쉽다, 그런 생각도 들었다. 다시 혼자가 된다는 게 좋기도 하지만 말이다. 대청소할 시간이 돌아온 것도 좋다. 아침에 된장찌개를 끓여주는 것으로 배웅을 하고는 달리러 나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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