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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현 Oct 11. 2022

71-74일 차 : 평행,일상을 전력질주, 조용한 고백

다시 달리기,아침기도,소금 바람,붉은 소망,사라지다,걸으멍달리멍,검은해변

71일 차


평행


바다는 언제나 하늘빛이다. 흔히 바다빛이라고 하면 파란색이나 초록색이 섞인 푸른색을 떠올리겠지만, 사실 어떤 말로도 정의되지 않는 바다의 빛깔은 항상 하늘에 달려있다. 바위틈으로 파도가 부서져 내리는 광경을 하염없이 보다 보면 어느새 구름이 저 멀리 나아가고 바다의 빛깔도 하늘에 맞춰 달라진다. 바다와 하늘은 맞닿아 있지 않지만 둘은 늘 서로를 닮고 서로를 담는다. 그런 평행선 같은 관계가 부럽다.


많은 사람들 틈에서 나는 깊은 이야기를 할수록 되려 벽에 가로막히곤 했다. 서로 깊은 이야기를 나누어야 사이도 깊어질 수 있는데 대부분의 경우 조금만 생각하고 말해야 하는 주제를 꺼내면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멀어진다. 친구 관계를 오래 유지하려면 정치, 돈, 종교 얘기는 하지 말라고들 하는데 사실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고 각자의 가치관과 신념을 어떻게 나눌 수 있단 말인가. 무슨 이야기를 해도 이념 논쟁으로 받아들이거나, 자신과 다른 의견을 공격으로 받아들이거나 우열을 가르는 기준을 들이대려 하는 사람들 틈에서 나는 많이 상처받았다. 물론 내가 상대방의 가치관을 받아들이지 못해 상처 줄 때도 있었겠지. 하지만 이 사회에서 나는 윤리적인 이야기를 할 때 대부분의 경우 상처받는 쪽에, 혹은 부정당하는 쪽에 서 있었다. 내가 그냥 아는 사이 정도의 관계라도 유지하려고 서로 민감한 논의를 꺼내지 않더라도 상대방이 먼저 주제를 꺼내고 그에 동의할 수 없는 나는 멀어지는 그런 일이 반복되었다. 


그렇게 깊어지려고 할 때 오히려 가로막히며 막막함과 서운함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관계. 반박하거나 자기를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관계. 그러면서도 서로를 담고 닮아갈 수 있는 관계를 맺는다면 참 기쁠 텐데. 그런 관계가 어떻게 가능할까 싶었는데 하늘과 바다가 그렇다.

항상 이런 건 자연에서 배운다.



다시 달리기


도전은 끝났지만 이제 기초체력, 근력이 생겼을 뿐이다. 나는 계속 달리고 운동을 할 생각이다. 오랜만에 혼자가 되자마자 달리기를 했는데 웬 걸, 페이스 올렸더니 힘들어서 15분 뛰고는 지쳐버렸다. 그래도 나의 다음 목표는 5분 기준 평균 페이스 6분대 달성하기. 그리고 돌아간 후에 대해서도 슬슬 생각하고 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돌아가면 계속 새벽이나 저녁에 달리기를 할 거고 자전거도 타고 클라이밍도 배워보고 싶다. 줌바도 다시 열리면 해봐야지.


보다 유연한 사람이 되고 싶다. 마음이 좋게 말해 대쪽 같고 좀 다르게는 고지식한 편이라 몸이 먼저 유연해지면 마음도 따라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걸어본다. 오늘은 별로 안 뛰었으니 내일 또 뛰어야지. 이런 근성은 마음이 몸에게 준 선물이다.



일상을 전력질주


빨래한다고 세탁실에 왔다 갔다 했는데 그때마다 내달렸다. 달릴 때 몸이 일정한 무게로 흔들리고 바람이 온몸을 휘감는 그 감각이 좋다. 바람이 좋아 저녁 산책을 나갔는데 걷고 또 걷다가 어느 순간 온 세상이 투명해 보여서 달렸다. 바다도 하늘도 길도 공기도 모두 다 투명해 보일 정도로 반짝여서 그 속에서 달리고 싶었다.


오래 달리기와 전력질주는 확실히 다르다. 온몸에 힘을 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힘을 주고 무릎을 올리는 동작을 크게 하며 땅을 강하게 박차고 달렸다. 중력이 느껴졌고 내 몸이 탱탱볼처럼 튀어 오른다. 자연스럽게 웃음이 터지고 뒤를 돌아보니 순식간에 꽤 긴 거리를 뛰어넘었더라. 세상이 빛나고 바람은 시원하다. 무엇 하나 단단하지 않아서 넘어지는 것이 두렵지 않았다. 내 몸조차 무너지지 않고 탄력적이기까지 한 고무처럼 느껴졌다.




72일 차


아침 기도


커튼을 걷었는데 오늘따라 모든 것이 선명해서 창에 이마를 대고 잎사귀 하나하나를 오래도록 세어보았다. 아마도 오랜만에 아침부터 날이 맑아 그런 모양이다. 한동안 잔뜩 흐렸는데 드디어 날이 풀리기 시작했다. 몇 해 전 그날의 날씨는 어땠더라. 평범한 날이었고 전공 수업이 많아 정신이 없는 하루였다. 모바일로 기사도 제대로 찾아보지 않고서 하루를 보내다가 동기들과 함께 정문을 향해 걷는데 모두가 그 얘기뿐이었다. 하지만 다 구조했다던데? 다행이야, 다행이다. 안도감이 밀려들었고 우리는 비슷한 교통수단에서의 대규모 사고로 기억되는 대구 지하철 화재 사건 피해자들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나 문자 등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때 우리는 몰랐다. 그날의 재난과 악의적인 오보가 우리 모두의 삶에 커다란 흉터를 남길, 애도할 수 없는 긴 시간의 시작이었다는 걸. 무지했고 안일했던 그런 안도감을 다시는 느낄 수 없게 되었다는 것도.


솜털 같이 옅은 구름을 올려다보다 충동적으로 기도를 했다. 손을 맞잡고 눈을 감고 엎드린 채로, 남겨진 사람들이 죄책감 없이 살 수 있도록 해주세요, 남겨진 사람들의 탓이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결코 죄가 없습니다. 그렇게만 기도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던 순간들이 죄책감이 되지 않았야 한다. 몇 년을 이뤄지지 못한 그 소망을 또 빌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자들이 져야 하는 죄의 무게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이들이 대신 지는 일이 반복되는 세상이 아닐 수 있도록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는... 그냥 기도를 했다. 이 맑고 푸른 아침에.



소금 바람


바닷가의 식물은 염분 섞인 바람 때문에 오래 살지 못한다고 한다. 많은 식물들이 잘 자라다가도 바람이 강하게 불면 염분에 절여져서 갈색으로 말라버린다. 새로 뿌리를 내리기도 쉽지가 않다. 좀 자리 잡을만하면 바람이 불어 넘어지고 좀 익숙해질 만하면 드러난 뿌리가 염분에 말라간다. 겉보기에는 온갖 식물들이 잘 자라는 아름답고 기름진 땅 같겠지만 제주도를 이만큼 가꾸고 유지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이 필요했겠다 싶다. 자생하는 식물 외에도 너무 많은 식물들이 이 섬에 뿌리내리게 되었는데 이 모든 것이 사람들의 욕심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비바람에 쓰러진 관목들의 드러난 뿌리가 주홍빛으로 바래는 것을 며칠 동안 지켜보았다. 자연과 시간은 어떨 때는 참 가혹하구나. 하지만 또 그 관목들이 한창 꽃을 피울 때는 비바람을 거뜬히 견뎠던 터라 다 순리이고 자연스러운 거구나, 하는 그런 양가적인 생각도 든다.


건조함과 찬 공기, 뜨거운 볕에 익숙해진 내 그을린 피부도 염분 섞인 습기는 견디지 못하고 괴로워하고 있다. 이곳에서의 한창때가 저물어가는지도 모른다.



조용한 고백


저녁임에도 어둠이 짙게 내린 서귀포 깡촌으로 친구가 찾아왔다. 먼 길을 와주었다. 이 시간에 벌써 어둡냐며 신기해하는 친구에게 오늘은 달빛이 들어 많이 밝은 편이라고 하는 내가 우스웠다. 시골의 이른 밤에 익숙해져 버렸다. 마주 앉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술을 찾는 친구에게 나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했다가 왜?라는 질문 앞에서 나는 꼭 장난을 꾸미다 들킨 아이처럼 조금 수줍게 아팠다고 말했다. 내가 왜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우울과 불안, 투병의 나날에 대해 고백했다. 정말로 무언가를 고백하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이런저런 근황을 나누었고 같이 화도 내고 공감도 하며 밤이 저물었다.

그때 나는 다 괜찮아지고 있다고, 이제 거의 괜찮다고 걱정할 것 없다고 말했다. 어떻게 걱정을 안 하겠냐는 다정한 말에 그냥 웃었다. 만나자마자 바로 이야기하게 될 줄은 몰랐었는데 이제는 웃고 즐겁게 보내기만 하면 될 것 같아서 지금은 잘 되었다 싶다.




73일 차


붉은 소망


어제 본 노란 보름달이 해가 뜨기 직전까지 불그스름한 빛을 내며 서쪽 하늘에 걸려 있었다. 동쪽 하늘에는 붉은 해가 타오르고 서쪽 하늘에는 그 빛을 빌려 빛나는 달이 지고 그 사이에 호랑이섬이 웅크리고 누워있다. 여전히 이 모든 것이 믿기지 않을 때가 있다.


보통은 달을 보며 소원을 비는데 오늘은 해를 보며 소원을 빌었다. 두 손을 맞잡고 눈을 감는다. 간절해 보이기 위해서인지 간절해서인지 알 수 없는 역사가 오래된 동작을 되풀이하며 소망했다. 어떤 소망이 그냥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건 너무 양심이 없는 것 같아서 노력하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빌어왔는데 요즘은 그냥 소소하게 이 시간들이 행복하기를 빌기도 한다. 매일매일 해가 뜨고 달이 뜨니까 소원도 그 순리에 맞춰 작고 짧게 빌면 보다 잘 이루어질지도 모른다.


솔직히 그런 기원 행위는 일종의 다짐이다. 스스로에게 하는 약속, 스스로에게 비는 소망.




74일 차 


사라지다


경계라는 건 사라지기도 해야 아름답다. 또렷하기만 해서는 그저 폭력일 뿐이지만 사라지고 다시 그어지는 유동성을 가질 때 경계는 그 어떤 선보다 아름다운 공간이 되고 장소가 된다. 오늘의 수평선이 그렇다. 흐릿해서 하늘과 바다가 잘 구분되지 않는다. 사라진 경계선을 가늠하며 그 위를 두 손가락으로 걸어보기도 했다. 이럴 때마다 설문대할망이 떠오른다. 어떤 이야기가 삶에서 계속해서 떠오른다는 것은 그 이야기의 허구성이 현실과 뒤섞여 있다는 뜻이 아닐까. 누군가는 설문대할망이 허구일 뿐이라고 말하겠지만 내 삶에서 그는 내 먼 뿌리이고 이 세상의 시작이며 최초의 경계를 그은 자로서 실재한다.


하늘과 땅을 가르고 그의 치마폭에서 떨어진 흙으로 산을 세운 거인. 그는 가르고 만들고 부수는 자이고 끊임없이 경계를 창출하는 아름다운 자이며 인간의 욕심으로 격하되고 사라져 갔음에도 다시 이야기 속에서 먼 미래의 삶으로 침투해오는 친밀한 영혼이다.

내 삶이 아름다울 수 있는 길은 분명 이야기에 있다. 삶의 길과 내가 살아가는 이야기의 뼈대는 허물어지고 다시 세워지고 그렇게 빛날 수 있다. 설문대할망은 매번 나에게 자연의 언어로 그것을 일깨운다. 상기된 뺨을 스치는 바람의 속삭임으로, 손끝을 따라 밀려오는 파도의 울음으로, 흔들리는 가지와 젖은 날개를 떠는 나비의 몸짓으로, 햇빛에 마르는 현무암의 짠내와 수수꽃다리의 향기로.



걸으멍 달리멍


바닷가를 따라 걷고 점심을 먹고 작은 마을을 한 바퀴 돈 후에 굳이 버스를 마다하고 도로변을 따라 옆 마을의 시내로 향하는 먼 길을 함께 걷는 동안 친구가 말했다. 일이 아닌 다른 이유로 지칠 수 있어 좋다고. 내가 열심히 달린 이유도 그와 같아서 무척 공감이 되었다. 매일같이 앉아서 일하고 공부하는 우리라서 몸을 크게 움직이고 여러 장소를 오가는 길 위에서 지쳐가는 일이 드물었다. 갇힌 공간에서 옴짝달싹 못하는 채로 망가져가는 일상이었지. 나는 그래서 걷는 걸 좋아했었고 이 섬에서는 맨몸으로 가장 먼 거리를 이동하는 운동인 달리기를 했다.

앉거나 누워있는 동안 목, 어깨, 등허리에 쌓이는 피로는 말 그대로 누적되어서 몸을 망가트리고 그 자리에 주저앉게 만든다. 벗어날 힘조차 빼앗으며 무거운 짐짝처럼 얹어진 피로는 무기력이 되고 그때의 나는 눈을 감는 것 외엔 다른 도피처를 찾을 수 없었다. 그곳을 도무지 벗어날 길이 없었다.


그러나 마지막 힘을 짜내 몸을 일으켜 먼 거리를 걷고 달리기 시작하자 그 무엇도 내 몸 위에 다시 쌓이지 못하고 튕겨나가 흩어진다. 바람에 흩날리고 햇빛에 마른다. 마치 널어놓은 빨래의 물기처럼 피로는 깨끗함만을 남기고 공기 중으로 증발한다. 땀을 씻어낼 때 땀방울에 섞여 흘러나온 고통, 불안, 초조도 씻겨나간다. 일상의 부산물들을 날리려면 앉거나 누워있는 자세를 벗어나 움직이면 된다. 바람을 맞고 볕을 쐬고 걷거나 달리면 된다. 그 무엇도 몸에 쌓여있지 못하게 온몸을 흔들며 즐겁게 춤을 추면 된다.



검은 해변


걷고 또 걷다가 검은 해변에 도착했다. 모래가 거뭇거뭇해서 깜짝 놀라 뛰어가 보니 곱게 갈린 짙은 색의 모래가 해안을 채우고 있었다. 현무암이 바스러져 모래가 된 것일까 하고 생각하며 뛰어다니다 올라가서 보니 강에서 떠내려오며 마모된 현무암과 해안가의 수중화산들로 인해 만들어진 현무암이 부서져 모래사장을 이루었다고 적혀 있었다. 젖어서 짙어진 모래사장은 봤어도 모래가 온통 검은빛인 해변은 처음이었다. 벌도 아니라서 손바닥으로 쥐었더니 모래가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꼭 진흙 같은 색이지만 알알이 흩어지는 모래. 근처에 씻는 곳만 있었다면 신발을 벗어던지고 싶을 만큼 감촉이 좋았다.


해변 입구 중 한 곳에는 파도에 휩쓸려온 나무 조각들을 하나씩 주워와 달라고 적혀 있을 정도로 이 검은 해변에는 유목이 많았다. 꼭 누군가가 다듬어서 바다로 띄워 보낸 양 반듯한 나뭇가지들, 그리고 모래 틈에 쌓인 나뭇잎들. 바닷속에 숲이 있고 누군가 거기서 가지와 이파리들을 꺾어 보내는 게 아닌지. 소설로 쓰고 싶은 소재들이 잔뜩 있는 해안을 또 하나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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