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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현 Oct 11. 2022

84-85일 차 : 또다시 여행

남향-해에게, 작은 어른-나에게, 꿈에서

84일 차


남향-해에게


내일 오전에는 비가 온다니 오늘이 마지막 해맞이가 되려나 싶다. 2월에는 해가 7시가 넘어서나 떴는데 지금은 6시 전에 나가야 일출을 본다. 담에 올라 아무렇게나 앉아 무겁지만 포근한 바닷바람을 맞았다. 이 시간의 해는 아무리 밝아도 뜨겁지 않고 아프지 않다.

너는 어때, 그 하늘에 높이 올라 서울도 내려다 보고 여기도 보고 사람들이 지긋지긋하지는 않니? 덥다고 눈부시다고 활로 쏴버리던 옛사람들부터 쳐다볼 여유도 없다며 외면하던 요즘 사람들까지, 그런 사람들이 네가 수평선, 지평선 위로 떠오를 때만 그렇게도 찾아대며 의미 부여를 하는 게 우습지는 않았니?


남향이 왜 좋은지 알겠어. 하루 종일 너를 보거든. 네가 움직이는 궤적을 따라 하루가 가고 네가 안 보이면 우울하지만 보이는 날이면 활기찬 하루가 돼. 자연의 시간에 맞추어 하루가 흘러.


모두가 그렇게 남향에 살 수 있다면, 모두가 이 바다와 해를 보여주려고 어떻게든 창을 내고 서로 조망권을 지켜주고 한 방향으로 집을 짓듯이 해가 닿지 않거나 해를 볼 수 없는 곳이 없도록 노력한다면? 온 세상이 남향이라면 모두가 좀 덜 싸우려나. 아침이 밝아오고 밤이 오는 당연한 일들을 그 누구도 잊지 않고 살아간다면 참 좋을 텐데.



작은 어른-나에게


어릴 때는 어른이 되는 게 너무 싫었는데 사실 어른이 무엇인지도 잘 몰랐다. 그런데 바다를 바라보던 내가 그러더라. 여기 처음 왔을 때 너덜너덜한 바보였던 내가 지금은 잘 기워진 바보가 되었다고. 그렇게 버려지지 않고 스스로를 수선해가며  나는 많이 자랐다.


역설적이게도 어른이 된다는 건 작아지는 일이다. 마음이 커지고 세상이 넓어지는 데 반하여 나 자신은 자꾸만 작아지는 일. 안 그래도 작았던 나는 더 작아지기가 싫었다. 내가 보는 세상이 커지는 줄도 모르고 그런 건 생각도 못하고서 그냥 나만 컸으면 했다. 그러면 작은 우물 안 개구리로만 남는 줄도 모르고 그랬었다.

사장님이 원래 이 정도로 컸었냐고 물으셨을 때 순간 키가 자랐다는 말인 줄 알고 저 다 컸잖아요?라고 대답했었다. 하지만 몸은 성장을 멈췄어도 나는 이제야 자라고 있다. 웅크린 채 이곳에 도착했던 내가 지금은 등허리를 펴고 가슴과 어깨를 펴고 서 있어서 처음보다는 커 보였던 걸까?


스스로 이제 어른이 된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한참이나 자라지 못하던 아이가 이제는 자라기 시작했다. 사랑을 알고 사랑할 줄 알고 사랑받을 줄도 알게 되었다. 특별할 필요도 없고 유별나다는 타박을 들을 이유도 없다. 그냥 좀 별나게, 그렇게만 살아야지. 그렇게 살자. 내가 너고 네가 나야. 그런 메시지를 파도 소리와 함께 남겼다.



꿈에서


밤바다를 보러 나왔다. 세상이 온통 캄캄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하늘과 바다를 구분할 수도 없는데 하얀 포말만이, 파도만이 빛나며 무수한 선을 그리는 그런 밤을.


다 좋았지만 역시 마지막은 이 밤이다. 홀로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어른이 되고 싶었던 나의 밤, 나의 바다.


매일 밤 이곳에 오고 싶다. 아침의 바다여도 좋고 낮도 좋고 저녁도 새벽도 밤도 다 좋다. 하루를 보내고 지쳐 눈을 감으면 꿈에선 이 바다로 와서 다 괜찮아지는 거다. 매일매일 꿈에서 바다를 건너고 하늘을 가로질러 이곳에 왔다가 다시 돌아가 눈을 뜬다면, 나는 정말로 괜찮은 어른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85일 차


또다시 여행


난생처음 혼자 해외여행을 갔을 때, 마지막 날 좋아했던 공원을 다시 방문해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지 몰라 두고 가야 하는 도시의 강과 바다의 경계를 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그랬다. 지금도 그런 기분이다. 마지막을 어떻게 보내야 오래도록 내 안에 새겨질지 모르겠다. 그냥 많이 걸었고 많이 달렸던 길을 아무 이유도 없이 발 가는 대로 달리다 멈추고, 또 달려 보고 그랬다.


인사도 다 드렸고 정리도 마쳤고 여유 있게 걸을 시간도 남겼다. 축복처럼 내가 가장 좋아했던 풍경들을 다 볼 수 있었다. 어제는 맑았고 밤에도 파도가 높았다. 바다가 살아 숨 쉰다는 증거가 해안에 가득했고 지금은 오늘의 만조다. 빗소리를 들으며 눈을 뜨고 비가 그친 직후의 거친 바다를 보며 떠날 수 있다니. 범섬은 맑은 날보다 흐린 날 빛무리가 적어 더 선명한데, 덕분에 선명한 바위섬들과 수평선도 보고 있다.


여는 또 물에 잠겼고 내가 어제 올라섰던 바위들도 바다에 잠겼다. 모든 게 날 위한 것만 같다. 밀려오는 거센 파도는 가라고, 가라고, 내 등을 떠미는 듯하다. 나는 늘 엘사를 동경했지만 결국은 안나를 더 가까이 느꼈다. 정말로 마법이 없어도 어른이 될 수 있고 여행을 할 수 있나 보다. 다친 무릎의 욱신거림도 부어오른 발도 코를 찌르는 짠 비린내도 손이 찐득해질 정도의 염분도 다 내가 지금, 여기, 발 디디고 서 있다는 뜻이다. 나를 증명하는 감각이다.


또 한참 길어졌다. 수다쟁이는 이제 뭍으로 간다. 다시 이 바다에 올 때까지 또 여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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