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에 비가 너무 많이 왔다. 현관문 틈으로 비가 새어 들어오는 상상을 하다 보니 정말로 겁이 나서 신발장을 한참 노려보다 잠들었다. 지금은 엄청난 안개와 바람이 여전히 위협적이긴 해도 비는 잠시 그쳤다. 하루 종일 비가 온다고 했으니 오늘은 어디 안 가고 집에서 짐을 싸기로 했다.
어제 검은모래해변에서 혼자 신나서 뛰고 돌아다니고 넘어지고 난리도 아니었는데, 그래서인지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프다. 생채기에는 바로 딱지가 앉았다. 오래갈 상처는 아닌 모양인데 정말 새빨간 피를 보았다. 그 혈색을 보고 뭔가 내가 건강해졌나 하는 엉뚱한 생각도 했다. 어깨와 팔이 유난히 아픈 건 아마 어제 종일 가방이랑 빵 봉지를 들고 다녀서 그런 거겠지? 이따 스트레칭도 잘해줘야지. 늘어지지만 오늘의 감금생활을 슬기롭게 헤쳐나갈 거야.
기우제를 마치고
그간의 기우제가 너무 잘 통했는지 마당이 물에 잠겼다. 잠깐 산책을 하고 왔는데 까치발로 걸어도 찰박찰박 소리가 나도록 발이 잠겨서 젖었다. 평소에는 햇살 때문에 저녁때가 될 때까지 켤 일이 없던 조명을 아침부터 켜고 침대 위에 바르게 서서 몰아치는 파도를 구경했다. 겉옷들을 정리해 넣으니 방 한편에 사람처럼 옷을 뒤집어쓰고 서 있던 간이 옷걸이가 휑하다. 내 방의 허수아비 같은 존재였는데, 허전했다.
두고 갈 것, 버릴 것, 챙길 것을 대강 훑어봤는데 옷 외에는 크게 신경 쓸 짐이 없다. 그렇게 눈으로만 익혀두고 정리를 관뒀다. 이거면 됐지. 아직 생활을 해야 하니 다 집어넣을 수는 없다. 아니, 사실 그냥 좀 더 이 방이 내 방이었으면 좋겠다.
먹을 것이 거의 없는데 비도 와서 배달 음식을 시켜 간만에 포식을 했다. 거의 끊었던 맥주도 처리할 겸 마셨더니 보리향이 나는 알콜이 순식간에 몸 한 바퀴를 도는 게 느껴졌다. 눈가가 느슨하게 풀어진다. 그러는 동안 화장실 창으로 바람소리가 새어 들어오고 빗방울이 큰 창을 두드린다. 내일은 맑았으면 좋겠다. 어제처럼 많이 걷고 많이 뛸 거다. 단, 넘어지지는 말고.
주홍빛 뒤꿈치
발 디딜 틈 없이 공간을 빼곡하게 메우던 빗줄기가 사그라들자 물방울이 물러난 자리마다 사람들이 들어섰다. 사람들은 묵직하지만 습하지 않은 바람을 가르며 산책을 하고 미역을 따고 운동을 하고 아이에게 바다를 가르쳤다. 다들 어디에 있다가 어떻게 알고 비가 그치자마자 나타난 건지. 모두들 나처럼 창밖만 바라보며 거친 바다를 보러 나갈 생각에 들떠있었나.
첫걸음에 본 건 바다 위의 먹구름과 믿을 수 없이 새파란 반대편 하늘. 두 번째 걸음에는 섶섬과 한라산을 덮어버린 둔중한 구름덩어리. 세 번째 걸음에는 서쪽에서 비치는 석양빛을 반사하며 등을 빛내는 범섬. 네 번째 걸음을 내딛으면서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빛깔로 노을이 진 바다를 보았다.
내가 떠나기 전에 이런 풍경을 보여주려고 내내 날이 변덕스러웠다고 생각해도 될까. 홀린 듯이 주홍빛으로 물든, 범섬과 하늘과 부서지는 거친 파도를 보며 멈춰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니 슬리퍼에 쓸린 발바닥이 유난히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뒤꿈치가 꼭 봉숭아 물들인 것처럼 붉었다.
83일 차
늦은 밤
어떤 일을 앞두고 긴장이 풀어지지 않으면 새벽까지 잠들지 못하는 버릇이 있다. 늦게 자는 것 자체가 하나의 스트레스인 이유는 그 때문이다. 그럴 때면 슬프고 우울한 이야기를 되새기거나 그런 상상을 하며 울기도 한다. 이곳에서는 울 일은 별로 없었는데 지난밤 체내에 고여 있던 묵은 눈물을 다 짜낼 것처럼 울었다. 아침에 거울을 보니 역시나 눈이 부었다. 너무 슬픈 소설을 읽어버렸다. 별 내용도 아닌데 이런 늦은 밤에 보면 항상 운다. 남일인데 내 일처럼 이입해서 눈물 콧물을 다 쏟았다. 환절기마다 나를 괴롭히던 비염이 여기서는 잠잠했는데 이번 기회에 도시에서부터 묵은 콧물을 다 쏟아낼 참이었나 보다.
씩씩하게 마무리를 하고 있는데 속마음은 그렇지가 않았나 보다. 매일매일 바다를 보다 울컥하던 것이 밤에 터져 나온 걸 안다. 이 평온함이, 그러나 충분히 치열했던 회복기가 끝나가는 게 아쉽다. 하지만 모든 것이 당연해지기 전에 떠나야 한다니까. 돌아가서도 하고픈 게 있다니까.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다시 건조해진 콧속에 진한 소금기를, 부어오른 눈에는 아찔한 빛 안개를 담는다.
해를 등지고 앉아 있으니 어깨와 등허리를 뜨거운 열이 주무른다. 이러다 바닷가 담벼락 위에서 졸더라도 미역줄기가 흩어진 젖은 바위 위로 곤두박질 칠 것 같지는 않다. 바람이 지켜줄 것만 같고 그렇다.
바다 시계
어제부터 바삐 일하는 주민들을 많이 보았다. 바다를 향해 손이 닳도록 빌면서 제의를 지내는 분들도 보았다. 채집을 생계수단으로 삼으면 바다의 시계에 따라 일하게 된다. 폭풍이 몰아치면 휴일이 되고 비가 그치면 늦은 저녁에도 미역을 줍기 위해 나간다. 다음날 이른 오전에는 밤새 파도가 쌓아둔 미역을 끌어올리고 바위에 걸터앉아 다듬는다. 해안이 온통 미역줄기로 가득해서 아무리 일해도 줄어들지가 않는다. 요 며칠은 미역을 줍고 다듬느라 바쁠 것이다.
대다수는 동일한 시간에 일한다. 나 같은 프리랜서 겸 학생은 마감에 맞추어 유동적으로 일하지만, 그래도 시계와 달력에 따라 일한다. 농사를 짓는 일도 기후에 영향을 받지만 정해진 일과를 비슷한 일시에 반복한다. 하지만 이곳의 채집은 시계나 달력이 아니라 온전히 바다와 하늘에 따른다. 생계가 자연과 맞닿아있는 삶은 꽤나 위험하고 치열하지만 부럽다.
흐르는 눈길
어릴 때 학원버스를 기다리다가 길 반대편을 달리는 아이를 눈으로 따라간 적이 있다. 처음이었다. 타인에게 오래도록 집중하며 흥미를 느끼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순간. 자극이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던 순간.
무언가에 눈길을 준다는 말의 의미를 그때 배웠다. 세상 모든 것이 움직이고 있다는 당연한 사실도, 나 외의 사람이 살아가고 있다는 당연한 사실도. 그 어린 날처럼 오늘은 오래도록 검은 바위틈에서 기어 나오는 게의 움직임을 바라보았다. 손가락 두 마디 정도로 작은 게들의 등껍질은 현무암을 닮아 까맸다. 그 너머로 파도가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간격을 두고 앞선 파도를 쫓아 밀려왔다.
얼마나 있었는지 노래를 흥얼거리며 담에서 내려오니 엉덩이가 얼얼했다. 내가 떠나도 계속될 이 평온이 영원했으면 한다. 언제까지나 고요하고 또 소란스럽고 분주했으면 한다. 그러기 위해 어떤 것들은 그만 발전해도 될 텐데. 무사히 바다와 하늘을 건널 수 있는 지금으로 인류는 충분하지 않은 걸까. 더 편리하지 않아도 충분하지 않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