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하지도 평범하지도 않은, 조용하게 별난 대학원생의 85일간의 제주산책
귤맛
내가 머물고 있는 펜션도 그렇고 주변 펜션의 사장님들 대부분이 농장을 겸업하는지 귤 무인판매대가 흔히 보인다. 그냥 귤 말고 한라봉이나 천혜향이 섞여있기도 하고, 아예 한라봉만 내놓기도 한다. 혼자 살다 보니 많이 먹지는 못해서 썩히게 될까 봐 적당한 양에 한 봉지 천원인 곳에서 나도 한 봉 집어왔는데, 도시 물가와 비교하니 역시 귤의 섬이구나 싶다. 바위틈 유채꽃, 그 앞에 귤 봉지를 흔들었다. 노랑, 주홍. 밝은 빛깔이 눈앞에 아른거리니 마음에 들었다.
그러고 보니 비거니즘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꿀을 벌의 몫으로 남겨두고자 하기에 '꿀맛'이라는 유행어 대신 '귤맛'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던데, 새삼 귤이라는 글자도 귤 자체도 귀엽게 느껴진다.
※ 제주 생활 정보 : 귤 한 봉지 살 수 있는 현금 1-3천 원 꼭 가슴에 품고 다니기. 마트에서 귤 사면 바보!
숭고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나 자신을 먹여 살리는 일과 그것을 위해 돈을 버는 일은 매우 숭고한 일이라고. 이상적이고 현실감각이 다소 떨어지던 나에게 기본적인 욕구를 채우고 경제활동을 하는 일은 어쩐지 세속적이고 하찮게 느껴졌던 때가 있었는데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그 모든 것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이후로 삶을 이어가기 위한 가장 기초적이고 원초적인 일들이 너무 힘들고 괴로워서 도망치고 싶을 때마다 그 숭고함을 되새겼다. 나는 더 큰 일을, 의미 있는 일을 할 수도 있는 소중한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살기 위해서 꼭 필요한 나라는 존재를 지켜내는 일을 하고 있다고. 어떻게든 살아내는 것이 모든 것의 시작이며 가장 위대한 일이라고.
혼자 살게 된 지 일주일. 그 숭고한 일의 절반 이상 내 손에 달린 나날을 보내면서 나름 순조롭게 나를 먹여 살리고 있다. 그리고 낭비 없이 냉장고를 잘 비워나가고 있다. 비록 표고버섯이 너무 많아서 다 먹지 못하고 반쯤 버리게 되는 불상사가 일어나긴 했지만 다시는 그런 일을 반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오늘따라 잔뜩 흐린 하늘과 더불어 질린 안색이 된 바다를 보며 사과했다.
냉동식품에서 벗어나니 여러 가지로 품이 들긴 한다. 가장 큰 일은 이틀에 한 번 꼴로 빵 한 조각이라도 사러 15분 이상 걸어 나가야 한다는 점이다. 오늘도 빵집에 들러 치아바타와 스콘을 샀고, 나간 김에 예기치 않게 20분 거리의 동네 마트까지 들렀다. 둘이 방향도 반대인데 왜 마트까지 갈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신중하고 겁이 많은 편인데 이곳에 오자마자 여러 번 충동적인 행동을 하고 있다. 그게 나쁘지 않아서 또 새롭다.
마트에는 생활용품과 애호박을 사러 갔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묶어서 반값에 파는 과자를 한 아름, 오징어채 한 봉지를 들고 있더라. 그것만 만원이었다. 간식거리를 줄여야 알뜰한 숭고(?)를 이룰 수 있으리니, 비닐 소비도 줄일 수 있으리니. 그런 의미로 이거 다 먹을 때까지 당분간 간식거리 구매를 금지하겠다고 다짐했는데 지켜질지 모르겠다. 원래 과자를 거의 먹지 않는 편인데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특별히 바쁘지 않으니 먹는 게 일이라서 입이 자꾸 심심한 것 같다.
그리고 내일은 오래간만에 들어온 일을 해야겠다. 먹는 것만큼 버는 것도 아주 숭고한 일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