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일 차 : 거인, 선생님

특별하지도 평범하지도 않은, 조용하게 별난 대학원생의 85일간의 제주산책

by 여현

거인


나를 가장 괴롭게 했던 건 그 무엇도 아닌 불면증이었다. 잠들지 못하는 것만이 불면증이 아니라 자꾸 깨고 선잠밖에 잘 수 없는 것도 불면증이다. 언제 잠이 들어도 항상 같은 시간에 눈을 뜨고 새벽에 홀로 깨어 어둠 속에서 뒤척이다가 겨우 선잠에 들지만 한두 시간 후 다시 눈을 뜨곤 했다. 몸은 너무 피곤한데 잠들 수가 없어서 아침에 침대에 누워 멍한 정신으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찾아오지 않는 평안을 기다렸다.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선잠에 들면 악몽을 꿨다. 엄청나게 무섭거나 잔인한 꿈이 아니지만 무언가에 쫓기고, 불안해하고, 초조해하고, 모든 일이 엉망이 되는 그런 꿈들. 악몽이라고 지칭하기가 애매하지만 나의 정신적 스트레스는 극에 달했던 그런 꿈들은 내 상태와 정확히 일치했다. 나는 애매하게 아팠고 어떻게든 그걸 다 견디고 있어서 누구도 내가 지친 줄 몰랐다. 새벽은 너무 외로웠다. 아무도 내가 아픈 줄 모르는 세계가 매일 새벽 나를 깨웠다.

최근에는 수면유도제 복용을 중단했고 오래 잠들 수 있게 해주는 약을 감량하고 있는데, 쉽지가 않다. 하지만 분명 수면의 질이 좋아지고 있었기에 마음을 놓고 있었는데 다시 예전처럼 새벽 3시에 눈을 떴다. 아 또, 하는 약간의 짜증이 밀려왔다. 곧 바람 소리에 놀라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을 청하긴 했지만 5시에 다시 눈을 떴다. 바람이 심상치 않았다. 어둠 속에서도 창밖의 나무가 마치 머리채처럼 흔들리는 게 보였다. 덜컹이는 창, 찌꺽이며 흔들리는 문, 그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휘이이잉 철썩, 파도와 뒤섞인 그 바람 소리.


불면증과 악몽, 피로감, 그리고 두려움. 나는 그 모든 것을 또 나의 방식으로 받아들였다. 그 순간에 내 머릿속에 떠오른 건 이야기였던 것이다. 밖에 커다란 몸집의 외눈박이 거인이 돌아다니고 있는 게 아닐까? 폭풍에 휩쓸리면 만날 수 있다는 제주 바다의 외눈박이 거인.


그런 방식으로 나는 그 새벽을 견뎠다. 그리고 몸을 일으킬 수 없다는 무력감이 아니라 날씨 탓에 몸을 움직이러 나갈 수 없을 것 같다는 아쉬움을 더 크게 느꼈다. 안심이 되었다. 잠들지 못하는 새벽이 또 찾아와도 나는 예전과 다르고 떨쳐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동 틀 무렵이 되자 어둡던 하늘이 어슴푸레한 옅은 색으로 바래진다. 창밖으로 밝은 별 하나가 눈길을 끌었다. 별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밝고 컸다. 별이다! 별이 맞나? 도시 출신이라 그런지 별빛을 의심하며 반기는 모순된 감상이 나왔다. 별지도를 들여다보며 하늘을 보다가 준비운동을 시작했다. 어느 순간 희고 푸른 아침이 오고 있었다.




선생님


결국 강풍에도 지지 않고 달리러 나갔다. 법환마을은 제주 본토의 최남단이라 태풍이 오면 가장 먼저 직격탄을 맞는 동네라던데, 여름이 아닌 계절에도 폭풍 같은 바람이 자주 찾아오는 모양이다. 돌풍이 몰아치는 가운데 달리기를 하려고 섰을 때 정말 날아갈 것 같았다. 기분이 아니라 몸이. 바람에 떠밀리고 흔들려서 중심을 잡고 자세를 잡는 게 쉽지 않았다. 하지만 달리고 싶어서 달렸다. 하고 싶다는 생각은 소중하기 때문에 나는 무시하지 않기로 했다.


런데이 어플에서 "바람을 느껴보세요!"하고 응원하는 소리가 들려왔을 때 엄청나게 날카로운 바람 속으로 뛰어들고 있던 터라 나도 모르게 "너무 추워요, 선생님!" 하는 외침이 터져 나왔다. 이른 아침이라 사람이 없길 망정이지 좀 창피했다. 소심하고 목소리 작은 내가 목청 높여 누구인지 모를 선생님을 갑자기 찾게 만드는 바람이라니. 내 외침에 내가 우스워서 한기에 덜덜 떨면서도 웃었다.

왜 선생님일까 하는 의문도 든다. 아마 나에게 선생님은 일종의 신과 같을 것이다. 나는 늘 선생님과 같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 했고 내 안의 선생님은 항상 나를 사랑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달리면서 선생님에게 호소하고 있자니 그 누구인지 모를 선생님이 멀고 먼 초월자에서 내 곁에 있는 누군가처럼 가깝게 느껴지기도 한다.


찬 바람에 턱관절이 아려왔지만 역시 달리길 잘했다. 달릴 때면 아무 생각이 들지 않고 주변의 풍경과 바람, 몸의 움직임, 내 숨소리만 가득한 그런 순간이 온다. 그렇게 오직 나만이 존재하는 듯한 순간을 거쳐 목표를 달성했을 때의 성취감도 크다.

지금도 광폭한 바람이 내 하루를 뒤흔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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