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하지도 평범하지도 않은, 조용하게 별난 대학원생의 85일간의 제주산책
기다림
요가를 하고 아침을 먹고 책도 읽고 청소도 했는데 9시가 되지 않아서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8시에서 9시까지 그 한 시간은 하루 중 가장 천천히 흐른다. 아마 직장인들에게는 가장 정신없는 출근시간일 텐데 말이다. 시간이 흐르는 속도는 항상 제각각인 게 분명하다. 사람마다 다른 것도 말이다.
10시에 문을 여는 마트까지 걸어갔는데 50분에 도착해서 조금 서성이다 들어갈 수 있었다. 근데 무슨 1인 가구가 장을 봤는데 4만 원이 나와... 물론 일주일 먹을거리는 아니긴 하지만 분명 2만 원 내로 생각하고 왔는데. 난을 보니 난이 먹고 싶고 난을 먹으려면 커리도 사야 하고 그런 식으로 하나둘 살 거리가 불었다.
집에 오는 길 동백꽃이 꼭 낙하지점을 골라 떨어진 듯이 나무뿌리에 안착해 있었다. 마치 나무에 기생하여 다시 피어난 것 같았다. 한참을 걷는데 햇볕에 목덜미가 뜨거워지는 감각이 기분 좋았다. 시원한 메밀국수가 먹고 싶었는데 메밀면이 떡이 되어 먹을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편의점에도 소면을 파는지 알아봐야겠다. 다시 요리할 힘이 없어 기력이 회복되길 기다리며 잠시 누웠다.
푸른빛
안개에 가려 흐릿했던 범섬이 돌아왔다. 짙푸른 바다도 하얀 포말도 안개가 걷히니 선명하다.
선명한 풀빛과 하늘색의 조화, 왜 지구가 푸른빛 행성으로 찬양받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다. 우주의 관점에서는 창백한 푸른 점이라지만 그 점보다 더 작은, 그 점 위에서 살아가는 나로서는 무엇보다도 이 별이 소중하다.
방에 들어찬 따스한 햇빛을 한참 쬐고 있었더니 다시 활력이 돌았다. 장 봐온 것들을 다듬고 설거지를 하고 쓰레기를 비우는 일까지 일련의 노동을 끝냈다. 씻어둔 야채가 건조되면 소분하는 일이 아직 남았지만 개운하다.
1인분
혼자 살면 요리의 양을 맞추기가 정말 어렵다. 세 번 정도 먹겠다 싶어 손질한 야채를 나눠 담았는데 담고 남은 걸 다 냄비에 넣었더니 넘친다. 더 큰 냄비를 꺼내자니 이미 아래에 멸치 육수를 담은 상황이라 망설여졌다. 처음에는 야채를 층층이 예쁘게 깔았는데 너무 많아서 마지막에는 막 담았더니 엉망진창이 되었다. 일단 끓여보고 남으면 내일 또 먹겠지. 내일은 커리를 해 먹으려고 했는데 안 되겠다. 항상 양 조절에 실패한다. 1인분은 언제나 넘치고 만다.
바다 보면서 저녁을 먹고 산책을 또 나가야지. 바람이 많이 불지 않으면 바위에 걸터앉아 소설도 읽을 테다.
시선
오늘의 저녁노을과 바다 빛을 보면서 결코 사진에 담을 수 없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매일매일 다른 이 빛깔들을 사진으로는 도저히 그대로 담을 수가 없어서 내 눈에 오래오래 담아두었고 잔상만이라도 마음에 남기를 기도했다. 그러나 사진으로 남길 수 없는 것도 다른 시선에서 남기고자 하면 나만의 사진이 된다. 그냥 풍경 사진이 아니고 내가 세상을 보는 시선이 담긴, 그 누구와도 다른, 내가 바라보는 방식을 담은 사진.
보이는 그대로의 바다와 노을을 담을 수 없다면 내가 노을을 만끽하는 시선을 담겠다. 나에게는 그 순간의 시선이 노을 그 자체보다 더 아름답고 노을 그 자체보다 기억되어야 할 무언가이므로. 찰나의 노을 대신 오래도록 남을 무언가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