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하지도 평범하지도 않은, 조용하게 별난 대학원생의 85일간의 제주산책
느림보
이제 가랑비쯤은 비도 아니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부는 가운데 달리는 것쯤, 여기서만 할 수 있는 경험이라는 생각에 개의치 않게 되었다. 바람에 떠밀려 달리는 것도 맞부딪히며 달리는 것도 다 좋다. 흐릴수록 달리기 좋으니까.
어제 산책을 시작할 때는 바다였던 곳이 산책이 끝날 때쯤엔 너른 바윗길이 되어 있는 신비스러운 변화를 경험했다. 여기는 시간의 흐름을 종잡을 수 없는 곳이다. 뭐든 반복되는 자연이 결코 변하지 않는 건 아니라는 사실. 도의 본질을 어렴풋이 느낀다. 이미 내뱉은 이상 그건 도가 아니겠지만.
오늘도 느리게 달리는 동안 바람의 변화를 온몸으로 느꼈다. 한 번에 달리는 시간이 길어지니 속도를 늦춰야 멈추지 않고 오래 달릴 수 있다. 그래서 자꾸 속도가 느려져간다. 그러나 나의 달리기 속도가 어떻든, 변덕스러운 시간은 즐겁게 나아간다. 가끔은 돌아오기도 하고 나를 기다려주기도 하면서.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말은 거짓이다. 다만 무엇을 기다리는지 알 수 없을 뿐이다. 이 우주에서 시간은 언제나 돌고 돈다. 그래서 느리게 달리면 오히려 앞서 달려갔던 것들과 다시 만나기도 한다.
썰물
어제는 썰물 때도 바다였던 곳이 다 드러나 오늘은 드넓은 바윗길이 되었다.
이대로 바다가 계속 물러나면 범섬까지는 가는 길이 열릴 것만 같다.
그런 날이 오면 범섬까지 달려야지.
쉬지 않고 달려야지.
그리고 아마 범섬 너머로
하늘까지 가는 길이 열릴지도.
땅과 하늘이 하나였던 태고의 세상이 열릴지도 모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