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일 차 : 갈증, 찌개처럼 단순한, 바람 타기

특별하지도 평범하지도 않은, 조용하게 별난 대학원생의 85일간의 제주산책

by 여현

갈증


빗소리조차 그친 적막감에 몸서리쳤던 불면의 밤을 지나 미뤘던 달리기를 하러 나갔다. 원래 어제 뛰어야 했는데 내가 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커서 하루 미뤘다. 대신 많이 걷긴 했지만, 아무래도 날씨 탓도 있고 잠도 못 잤고 하루 걸렀다고 몸이 무겁다.

한 번에 달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시작하기까지 더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냥 박차고 뛰면 어떻게든 될 텐데 아마 뛰는 것보다 멈추는 것이 나에게는 더 두려운 듯하다. 그런 나라서 휴학은 생각도 못했던 거겠지. 첫 발작을 겪고도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이 이번 학기 이제 막 시작했는데 종강까지 못 버티면 어떡하지? 였으니. 지금 보니 그게 내 성격이었다. 멈추는 게 두려워 시작도 전에 최악을 상상하며 불안해하는 것. 그리고 최대한 준비된 상태에서 뛰어들려고 하는 것. 그리고 막상 해보면 잘한다. 그것까지 모두 나다.


분명 10도가 안 되길래 잘 챙겨 입고 나갔더니 오랜만에 낯을 드러낸 해가 과하게 뜨거웠다. 타는 듯한 볕에 선크림이 녹아내리고 목이 바짝 말랐다. 이런 갈증은 오랜만이라, 처음으로 걷기 구간에서 잠시 멈추고 물을 샀다.(그 와중에도 달리다 멈추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렇게 더울 줄 알았다면 텀블러를 들고 나오는 건데 쓰레기를 늘려버렸다.

입 주변이 버석거리고 입안이 말라 침 한 방울 흐르지 못하는 목구멍이 찢어질 것 같은 이상한 감각. 몽골 사막에서도 이런 갈증에 내몰리진 않았었는데... 무거운 몸에 갈증에 뻣뻣한 몸과 리듬감을 잃은 다리에 비틀거리며 달렸다. 겨우겨우 오늘의 달리기를 마치고 나니 그제야 햇빛도 선명한 수평선도 또렷한 섬도 눈에 들어온다. 모두 반가웠다. 땀을 식혀주는 시원한 바람에 절로 눈이 감겼다.


힘들었지만 오늘의 달리기도 해냈다. 이제 훈련이 8번 남았다.


20220320%EF%BC%BF111258.jpg?type=w773
20220322%EF%BC%BF183256.jpg?type=w773



찌개처럼 단순한


낮에 그렇게 덥더니 다시 날이 흐려졌고 아직 새떼가 날아가는 건 보지 못했다. 집안 가득 퍼진 음식 냄새. 한가득 쌓인 야채 꽁다리. 내키는 대로 재료를 넣어 간을 한 정체불명의 찌개. 조용하게 잘 흘러가는 일상이 신기하다. 무엇 하나 급할 것이 없고 정체불명의 찌개처럼 단순하고 계획 없는 생활.


그래도 무언가 남기고 싶다는 욕망은 사라지지 않고 귀찮더라도 맛있는 음식을 해 먹으려는 것도 운동이라도 해서 성취감을 느끼려는 것도, 그리고 계속해서 나에 대해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것도 모두 원초적인 내 모습인 모양이다.



바람 타기


해가 완전히 떨어지기 직전, 구름이 다림질된 솜면처럼 하늘을 덮은 흐린 날, 종잡을 수 없는 풍향

세 가지 조건이 갖춰지자 작은 새들이 아주 낮게 종횡무진하며 눈앞을 스쳤다. 몇 번이나 새와 부딪힐까봐 놀랐고 온갖 방향으로 힘차게 날갯짓하며 바람을 타는 저 새들이 어디로 무엇을 하러 그리 바삐 날아가는지 궁금했다.


손바닥만 한 새들이 화살처럼 빠르게 공기를 가르는 사이로, 느린 걸음으로 귀가하는 진귀한 경험을 했다.


나는 요즘 새들이 가장 부럽다. 바람에 올라탈 수 있는 그들의 가벼움에 수만 번의 날갯짓이 전제되어 있음을 알면서도, 아니, 그걸 알기 때문에 부럽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46일 차 : 악몽, 시(詩)적 유리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