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하지도 평범하지도 않은, 조용하게 별난 대학원생의 85일간의 제주산책
책갈피
누가 꺾은 것인지 바람에 꺾인 것인지 알 수 없는 꽃잎이 바닥에 말라붙어 있다. 마치 책 사이에 말려둔 것 같다. 종이에는 노르스름한 물이 들었을 것만 같다.
내 일상의 한쪽 귀퉁이를 접듯이 걸음이 멎었다. 남은 시간들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돌아가도 좋다고 생각했지만 지난 시간 동안 생각보다 많은 것을 시도해왔다. 계속 계속 시도하면 되는 걸까?
아주 특별한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되는 걸까?
하나 확실한 건 여기서 한 장이 끝났고 새로운 장이 시작되었다는 사실. 내 책에도 작은 목차가 생겼고 색인에 이 섬과 마을이 새겨졌다. 그것만으로 남은 한 달이 설렌다.
정갈한 밥상
혼자 밥을 해 먹으니까 보통 음식을 덜거나 하지 않고 조리된 모습 그대로 먹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가끔은 스스로에게 남을 대접하듯이 식사를 차려주고 싶다. 요리도 차리는 것도 다 내가 하는 일이지만 냄비가 아니라 접시에 담긴 음식을 보면 대접받는 기분이다. 내 입맛에 맞추기보다는 되는 대로 요리하는 편이 아무래도 편하지만 가끔 손님 입맛에 신경 쓰듯이 하나하나 따져서 재료를 고르고 간을 보면, 애정 넘치는 요리사가 곁에서 내가 먹는 모습을 뿌듯하게 보고 있을 것 같다.
그런 존중과 애정이 정갈한 차림새에 깃들어 있어서 가끔은 잘 차린 밥상을 나에게 주고 싶다. 그런 것치고는... 카레와 난을 담다가 엉망이 되어버렸지만 알게 뭐야. 내가 기분 좋았으면 잘 차린 거지. 그런 의미에서 떠오른 추천 소설집, 『파인 다이닝』.(왜 굳이 영어여야 했는지는 솔직히 모르겠다.)
머무는 곳
사람들이 통과하는 곳은 길이 되고 사람들이 머무르는 곳은 장소가 된다. 나는 이 아름다운 해안이 길이면서 장소였으면 한다. 떠나온 곳으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 이곳을 찾아오는 여행객들이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라 쉬어가는 장소로 이곳을 보았으면 좋겠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걷지도 사진을 찍지도 않고 파도소리와 새소리에 귀를 열어두고 아무 바위 위에나 걸터앉아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는 시간을 가지며 머무르기를.
10분이라도, 단 5분이라도.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잠시 모든 것을 멈출 수 있는 장소로 그렇게 경험하고 기억해주기를 바란다. 스쳐가는 관광지 이상으로 이 해안의 장소성을 느끼고 돌아갔으면. 내가 느끼는 바를 누군가와 나눌 수 있으면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