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일 차 : 산책길, 다정한 여행

특별하지도 평범하지도 않은, 조용하게 별난 대학원생의 85일간의 제주산책

by 여현

산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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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앞 해안가로 나가면 바로 '흰돌밑'이 보이고 정면으로 범섬을 바라볼 수 있다. 그리고 흰돌밑과 범섬 가운데 '물새바위'(내가 붙인 이름이다)가 있다. 가장 좋은 전망이 물새들에게 주어졌다는 생각이 든다. 좋은 일이다. 거기서 포구 반대쪽으로 먼저 걷는다. 비가 오면 항상 물이 고이는 길을 느리게 통과해 해안길 끝으로 가면 법환과 강정 두 마을 사이의 바다경계에 이른다. 두 면이 만나는 물길이라고 해서 '두머니물'이라고 한다.


두머니물에는 바위 해안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반쯤 숨겨져 있다. 그 계단 옆으로 난 좁은 길을 좋아한다. 막다른 길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발길이 드물다. 거의 나만 매일같이 방문한다. 거기 걸터앉아 통화를 하기도 하고 책을 읽기도 하고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바람과 햇볕 사이에서 바다를 바라보기도 한다. 해 질 녘이 되면 일몰을 후광처럼 두기에도 좋은 숨은 명소다.


이곳에 매일 방문하면서도 그 좁은 길의 끝까지 걸어 들어간 것도 커다란 바위들 위에 올라본 것도 오늘이 처음이었다. 다음엔 계단 아래로 가봐야지. 긴 시간이 걸려 나에게 이 해안은 마음을 놓을 수 있는 안전한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모험이 시작되었다.



다정한 여행


이 해안에서 마주치는 모든 연인, 친구, 가족들은 친밀하다. 세상에 불행한 관계란 없다는 듯이 서로 애틋하고 다정하다. 집에선 손 하나 까딱하지 않던 남편이 기사가 되어 가사에 지친 아내를 여왕처럼 떠받들고, 서로를 향해 불평불만을 늘어놓으며 상처 주던 연인들이 서로의 어깨를 끌어안는다. 서로 다른 길을 걷느라 소홀해지던 친구들이 발을 맞추어 걷고 학창 시절처럼 흔들리는 잔가지에도 웃음을 터트린다. 그리고 혼자인 사람도 늘 멀리하고 멸시했던 자기 자신과 하나가 된다.


함께인 것이 구속이기보단 기쁨이 되고 혼자인 것이 외롭기보단 가뿐함이 되는 곳. 내일이면 돌아가야 하는 손님들이 아쉬운 한숨을 토하던 순간이 인상 깊었다. 다시 돈 벌어야지, 밥 해야지, 하고 떠넘겨지는 의무들이 중년의 부부 사이에 끼어들면서 멀어지는 파도소리처럼 두 사람의 대화가 줄어들던... 그분들은 마지막 반나절을 잘 즐기고 안전하게 서울로 가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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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에도 끄떡없던 유채꽃이 벚꽃이 날리듯 꽃잎을 자연스럽게 떨구기 시작했다. 유채꽃이 자라고 퍼지고 천천히 질 준비를 하는, 계절의 흐름을 함께했고 꽃이 지는 때까지 더 함께할 수 있음에 감사할 따름이다.

그러나 스스로 정했던 내 삶의 문장은 '일상을 돌아갈 곳이 없는 여행처럼.'

그러니 이곳을 떠나더라도 나와 나 사이의 대화는 부디 잦아들지 않기를, 파도와 바람 소리를 뛰어넘었듯 우리의 대화가 도시의 소음에도 묻히지 않기를. 끝나지 않는 여행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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