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하지도 평범하지도 않은, 조용하게 별난 대학원생의 85일간의 제주산책
삼켜진다면
밤새 비가 오더니 바다가 엄청난 기세로 땅을 향해 밀려오고 있다. 이곳의 산책로는 바위 해안을 끼고 두 층으로 되어 있는데 저 파도는 바위 해안을 다 삼키고 이층인 유채꽃밭에까지 침투할 기세다. 우산을 쓸 수조차 없는 비바람 탓에 나가볼 수는 없었지만 집에서 창 너머로 광범위하게 포말을 일으키는 거친 파도를 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그 위용을 방증한다.
하얀 포말을 지켜보고 있자니 파도가 이 마을을 삼킬 듯이 달려오는 듯한 착각이 인다. 나는 겁이 많아 떨어지고 구르고 다치는 상상을 많이 하는데, 지금은 그런 고통보다도 순식간에 삼켜져 그대로 녹아내리는 형태의 소멸을 떠올린다.
바다가 꼭 살아있는 것 같다. 삼켜지기 전에 내가 먼저 등불을 들고 제페토 할아버지처럼 그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 하는 게 아닐는지.
그런 감상에 빠져 있다가 비가 약해질 때쯤 돌풍을 가르고 잠깐 나갔다 왔다. 후드득 떨어지는 빗방울이 얼굴을 적시도록 놔두며 바닷가를 향해 걸었다. 가까이서 보니 파도가 더욱 거세다. 온 바다가 하얀 포말로 뒤덮였고 끝도 없이 새로워지고 있다. 바다의 위세에 밀려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럼에도 이 바닷가에서 맴도는 생명이 있었다. 아주 낮게, 날갯짓을 조금이라도 멈추면 곧바로 바다에 곤두박질칠 듯한 높이에서 새들이 바람을 타고 있었다. 조금만 서툴면 바람이 아니라 파도를 타게 될 것 같은 위태로움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가느다란 날갯짓.
산책로를 자유롭게 휘젓고 다니던 땅의 나비들은 모두 자취를 감추었는데 바다의 새들은 여전하다.
그러고 보니 그 나비들은 어디로 갔을까? 우리는 집으로 돌아가면 되는데 바닷가의 생명들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나비에게도 저 파도와 바람을 피할 집이 있는지. 잔뜩 오그라든 꽃잎 사이에라도 들어갔을지 어떨지.
살아있는 세계
몰아치는 서늘한 바람, 뜨거운 볕, 빗물이 고인 바다. 계절을 알 수 없는 낮이다. 부서지는 파도로 인한 물안개탓인지 포말에 반사된 햇빛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해안가에만 뿌연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바다는 처음 보는 암녹빛이고 저 멀리 서쪽에서 먹구름들이 또 매섭게 다가온다. 무엇이든 찢고 삼키는 괴물의 아가리처럼 높고 무거운 파도가 끝도 없이 밀려온다. 태풍이 오면 가장 먼저 큰 타격을 입는 이 마을은 기상 뉴스의 스타라고들 했지.
늦여름이나 초가을이 아니더라도 3월 말쯤에는 늘 이런 변화무쌍한 날씨와 거친 바다를 볼 수 있는 모양이다. 설문대할망이라면 분명히 이런 바다로 발을 디뎠을 것이다. 종잡을 수 없는 뒤섞인 시간의 섬은 신비로우니 그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았겠지. 일출과 일몰의 빛깔조차 비슷해 이곳의 새벽과 저녁은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이니.
점점 이곳이 더 좋아진다. 숨 쉬는 자연과 깨어있는 신화들, 지킬 수 있다면 좋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