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일 차 : 달구경, 사랑 노래, 아직은 먼 타인

특별하지도 평범하지도 않은, 조용하게 별난 대학원생의 85일간의 제주산책

by 여현

달구경


새벽 5시가 넘으면 마당의 가로등이 일제히 꺼진다. 올레길의 은은한 가로등은 켜져 있지만 내 방에서 달빛을 만끽하기엔 나쁘지 않은 어둠이 찾아온다. 아침과 새벽의 경계가 되는 그런 시간이다. 달리러 나가기 직전이기도 한 이 시간은 늘 두근거린다. 요즘은 구름이 두터워 별을 보기엔 적절하지 않지만 그래도 밝은 달과 금성만은 구름 틈에서도 빛을 낸다.


범섬 바로 위에서 눈썹달이 구름에 가리었다가 다시 얼굴을 드러내기를 반복한다. 들여다보고 있으면 시간이 멈추지 않고 흐르고 있음을 느낄 수 있고 어느새 검푸르던 하늘이 푸르스름한 회색빛으로 밝아온다. 그러면 달리러 나가면 된다. 해와 달이 자리를 바꾸는 때에 달리면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아침으로 도약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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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노래


운동할 때 항상 듣는 노래 목록이 있다. 몸이 데워졌을 때 숨을 뱉듯 흥얼거리면 그 노래들이 다 내 얘기 같다. 예전에도 가사에 몰입하고 이입한 적은 많지만, 지금 다른 점이 있다면 흔한 사랑에 대한 가사들이 다 내가 나에게 하는 말로 들린다는 점이다. 내가 이런 나인 것은 운명이고 스스로를 믿는다면 불구덩이도 두렵지 않다고 가사를 빌려 진심 어린 허풍도 떨 수 있다. 힘들고 지칠 때마다 매번 함께 해주고 일으켜줄 사람을 찾으면 나 자신에게 힘내라고 외치는 나를 발견한다. 어쩌면 사랑하는 연인에게 기대하는 모든 것은 가장 가까이에서 늘 그래 줄 수 있는 단단한 나에게 기대해야 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내가 사랑을 모르고 사랑받을 줄도 모르는 사람일까봐 늘 두려웠는데 요즘 들어 조금씩 사랑이 무엇인지 어린아이처럼 배워나가고 있다. 스스로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 내가 사랑하지 못하는 것 같아 자책했던 소중한 사람들, 그들이 한 명 한 명 떠오르고 보고 싶다. 좋은 걸 보면 함께 하고 싶다. 그런 마음이 다 그리움이고 정이고 사랑이라는 걸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표현하게 되기까진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지만, 나에게도 사랑이 있다고 스스로를 좀 더 믿어줄 수 있을 것 같다.



아직은 먼 타인


나는 새벽에 나가고 이른 오전에 나가고 해가 질 때 나간다. 외식도 하지 않고 카페에도 혼자서는 가지 않는다. 특히 사람들이 가장 활발하게 움직이는 오후에는 잘 나다니지 않고 주말에는 더 일찍 움직여 오후엔 웬만하면 집에 틀어박힌다.

이런 조심성과 대인기피증에 가까운 일상은 복잡한 원인들에서 비롯되었다.


미세먼지는 불가피한 오염에 대한 공포를 극대화시켰고, 펜데믹은 타인에 대한 경계심과 편견을 극대화시켰다. 이들은 내가 도시를 떠나 이 한적한 곳에 와야 했던 중요한 계기였다.


하지만 오늘은 힘이 넘치고 여운이 남는 소설도 읽어서 꼭 낮에 나가고 싶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내 기분을 따라나섰다. 나가보니 지역축제에, 주말에, 날 좋은 한낮...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방문객이 많을 수밖에 없는 조건이었다. 나는 마스크를 단단히 쓰고 다가오는 사람들을 피해 무수히 많은 반원을 그리며 둘러 걸었다. 잔잔하고 짙은 바다를, 따스한 햇빛을, 간지러운 바람을 따라 사람이 없는 나만의 아지트를 찾아서.


낯선 대중에 대한 과한 경계는 쉽게 누그러지지 않고 미워하고 탓할 일은 세상에 수없이 많다. 그래도 숨 쉴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을 찾아내 멀찍이 서서 사람들을 바라보니 사실은 그들도 나와 같은 이유로 잠시라도 숨통이 트였으면 해서 이곳에 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떠난 자리에 남은 많은 쓰레기에 다시 실망하기도 했다.


사람들과 섞여 들기 까진 아직 시간이 더 걸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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