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하지도 평범하지도 않은, 조용하게 별난 대학원생의 85일간의 제주산책
일렁임
어제는 고인 물이 바람에 일렁이는 걸 지켜보았고 오늘은 흐르는 잔물결을 바라보았다. 물가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는데 어느새 내 발밑에도 물이 흐르고 있었다. 사방에서 밀려오는 파도가 바윗길로 넘쳐흘러 내 발밑까지 넘실대고 있었다. 그 물도 흘러 흘러 멈추지 않는 잔물결을 일으킨다.
빛과 공기가 물에서 만나 만들어내는 둥근 물결을 보고 있으면 시간이 멈춘 공간에서 홀로 움직이는 듯한 기분이다. 시계는 멈췄는데 시간은 흐른다면, 도시는 멈춰버렸는데 세계는 계속된다면 이런 기분일까. 멸망이 찾아와도 시간은 흐른다. 삶은 내가 끝나지 않으면 계속되고, 내가 사라져도 파도가 치고 바람이 불고 커다란 새가 아침해와 함께 날개를 퍼덕일 것이다. 그렇게 세상에 단 하나의 일렁임이라도 존재한다면 모든 것이 멈추고 사라져도, 시간은 흐를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 왜인지 위로가 되었다.
잠녀
지구가 아름다운 푸른 별로 불리듯 초록은 싱그러운 생명력의 상징이다. 만조 때 볼 수 있는 검은 물결과 그 아래의 숲, 해수면의 초록 얼룩은 바다가 살아있다는 증거이다. 이 마을과 바다는 우리가 사랑하는 이 섬, 제주도에서도 가장 청정한 해안 중 하나로 보호되고 있다. 아직 사람에 의해 이름 붙여지지 않은 많은 생명들이 수면 아래 살고 있다고도 한다.
이곳을 삶의 터전으로 삼은 이 마을 사람들은 계를 이루고 조합을 이뤄 공동으로 해안과 수면 아래 숲에 숨 쉬는 생명을 빌릴 권한을 갖는다. 사람이 정한 규칙과 권한이 무슨 의미가 있겠나 싶기도 하지만, 사람을 막을 수 있는 건 역시 사람일 수밖에 없는 시대이므로 어쩔 수 없기도 하다.
그을리고 단단해진 피부는 염분과 바람으로 무두질되어 건조하고 거친 가죽으로 가공되고, 미끄럽고 날카로운 바위를 두려워하지 않는 작은 몸은 바닷속으로 망설임 없이 뛰어든다. 그 몸들을 언제까지나 바다가 안전하게 품어젔으면 좋겠다. 이젠 누구도 이어가려고 하지 않는 바다와의 관계를 바다만은 빼앗아가지 않기를 바란다.
봄이면 달래
어제 삼촌이 몇 번이나 달래장을 가져다주겠다고 말씀하셨는데 그게 바로 오늘일 줄은 몰랐다. 달래장만 갖다 주신 게 아니고 손질된 달래, 김, 단호박식혜까지 가져다주셔서 몸 둘 바를 모르겠더라. 전부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다. 친인척도 아닌데 나를 조카라고 불러주시고 이렇게 챙겨주시기까지 하는 그 마음이 너무 감사해서 몇 번이나 인사를 드렸다.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로는 이 마음을 다 담을 수 없어 같은 말이라도 몇 번을 반복했다. 참, 살얼음이 낀 감귤착즙주스도 주셨는데 서울 어디 카페에서 파는 스무디보다 훨씬 맛있었다. 착즙기로 직접 짜서 얼려 담아오셨단다. 살얼음이 녹을 새라 바로 마셨는데 양도 어찌나 많은지 따로 간식이 필요 없었다.
저녁은 구운 김으로 김밥을 싸서 먹었다. 김밥 속으로 오일장에서 얻어온 무장아찌를 넣었다. 달래장을 뿌려 먹으니 자극적이면서도 건강한 맛이다. 생각과 달리 이로는 잘 잘리지 않아 가위로 잘라먹었다. 봄기운을 입에 한가득 머금은 듯했다. 입에서 특유의 향이 싸하게 퍼졌지만 난 혼자 사니까 뭐 어때 싶다.
매일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을 그런 봄의 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