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일 차 : 멈출 줄 알기, 수면 아래, 끈끈

특별하지도 평범하지도 않은, 조용하게 별난 대학원생의 85일간의 제주산책

by 여현

멈출 줄 알기


어제부터 오른쪽 발목과 종아리에 바깥쪽으로 뻗치는 듯한 통증이 있어 달리기를 쉬어야 하나 한참 고민했다. 파스를 붙이고 스트레칭을 틈틈이 해줬는데 약발이 들어 통증이 줄었을 뿐 아침까지도 낫지 않았다. 그래서 2시간 동안 몸을 풀고 새로운 주법을 공부했다. 역시 뛰어보니 확실히 아파서 10분만 뛰고 새로 배운 주법 연습 자세로 걷기 운동을 하다 5분 정도만 가볍게 뛰고 돌아왔다.


매회차마다 들었다. 조금이라도 무리가 가면 즉시 달리기를 중단하라는 말을. 1분만 더 뛰면 끝난다는 식으로 참지 말라던 말들. 그 경고를 어기고 기어코 10분을 채우고 또 뛰고 그랬던 일이 바보 같은 짓인 걸 안다. 그래도 멈추었고 달리느라 여유롭게 보지 못했던 일출을 담장 위에 걸터앉아 오래도록 감상할 수 있었다. 달려야 했을 15분이 노래를 흥얼거리며 해를 맞이하는 순간으로 바뀌었다. 잠시 멈추어도 되는구나, 완전히 멈추는 게 아니라 다른 것을 보고 느낄 수 있는 여유를 주며 다음 달리기를 준비하면 되는구나.


돌아오는 길에 매번 급하게 인사만 하고 지나쳐야 했던 강아지를 쓰다듬어주니 아주 좋아했다. 다만 털갈이 중인지 털이 너무 날려서 돌아선 후에 열심히 털고 집에 오자마자 손을 씻어야 했다. 못된 알러지.


오늘은 달리는 법 중에 잠시 멈추는 법을 배웠다. 달리기를 멈춘다고 내가 정말 멈춰있지는 않더라. 그냥 달리는 일 말고 다른 걸 할 뿐이다. 삶은 쉽게 망하지 않는다.



수면 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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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포터 시리즈보다도 나를 깊게 매료시켰던 소설은 나니아 연대기이다. 좋아하는 장면들이 잔뜩 있는데, 그중에서도 루시가 배에서 바다 밑 인어소녀를 향해 인사를 하는 장면을 무척 좋아한다. 루시는 처음 만난 그 소녀와 자신이 함께였다면 분명 절친한 친구가 됐을 거라고 확신한다.

바위틈에 고인 맑은 바닷물을 살필 때마다 루시의 기분을 알 것 같다. 너무 맑아서 바위의 굴곡 하나하나, 특유의 거칠고도 미끈한 질감까지 눈으로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물이 맑다. 저 수면 아래에는 꼭 누군가 살고 있을 것 같아 가슴이 두근거린다.


아주 행복하거나 혹은 아주 지칠 때, 다른 세상에 가는 상상을 하곤 했다. 서울에서는 주로 잠실철교를 걸으며 귓가에 엄청난 소음을 내며 스쳐가는 지하철 유리창에 뛰어드는 상상을 했다. 유리 너머에는 앨리스가 갔던 거울나라 같은 어떤 이상한 세계가 있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요즘은 저 수면 아래 바위 세상에 갈 수 있을 것만 같다. 저곳은 아마 소인국일 테지. 아니면 나니아로 연결되어 있을까? 루시가 아직도 시간이라는 거인과 함께 살고 있을 나니아. 그런 세상이 이 지구에도 있다고 생각하면 외로움이 가신다.



끈끈


사람과 사람이 함께 한다는 건 단순히 곁에 머무른 것을 넘어 마음에,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함께 하는 일이다. 누가 여기를 참 좋아할 텐데. 누구한테 이걸 주면 정말 좋아할 텐데. 누가 이런 거 되게 좋아한다고 했는데. 그런 생각들이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끈이다. 끈끈하다는 말은 이런 끈이 아주 많이 겹쳐져서 어딜 가나 무엇을 보나 누군가가 생각나는 그런 순간들을 가리킨다.


나는 우울을 나누면 배가 된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좋은 것들은 나누면 세 배, 네 배가 되니까. 그러니 뭐든 나눠보는 편이 좋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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