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일 차 : 체화, 리드미컬한 지구력, 색색의 환대

특별하지도 평범하지도 않은, 조용하게 별난 대학원생의 85일간의 제주산책

by 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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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화


몸과 마음은 어떻게 연결되는 걸까? 나는 무엇이고 누구인가 하는 물음이 나를 향한 철학적 난제라면 몸과 마음에 대한 물음은 세상을 향한 가장 어렵고 중요한 철학적 난제 아닐까? 몸과 마음의 연결은 이 거대한 세상과 너무 작은 내가 뒤섞이는 시작점이니.


다른 건 모르겠지만 알람 없이 눈을 뜰 때 몸이라는 퍼즐 조각과 마음이라는 조각이 딱 맞물리는 듯하다. 약속한 것처럼 시간에 맞춰 눈을 뜨고 그럴 때면 게으른 나도 몸을 벌떡 일으킨다. 달리러 나가기 위해 이른 새벽에 눈을 뜨고 공복 운동에 취약한 몸을 위해 어둠 속에서 시리얼을 먹고 굳은 몸을 조금씩 움직이며 준비운동을 한다. 일련의 과정은 하고 싶다는 마음, 의지가 몸에 스며들고 몸이 그에 부응해주어 가능한 일이다.

의지가 몸에 닿는 순간. 마음이 뭔지 도무지 알 수 없고 어디까지가 내 몸인지도 알 수 없지만 뭔가 통하는구나, 무언가가 체화되었구나 하는 순간, 꽁꽁 숨겨져 있던 나의 마음과 욕망이 온몸 구석구석을 깨우며 세상을 향해 피어난다.



리드미컬한 지구력


10분을 뛰고서 생각했다. 와, 다음 달리기는 더 긴데 어떡하지? 그리고 다음 달리기 구간을 딱 절반 뛰었을 때는, 와, 이만큼 더 달릴 수 있을까? 그 순간에 맞춰 흘러나오는 마지막 두 곡은 달리기에 가장 잘 어울려서 전주부터 신이 난다. 걱정을 넣어두고 끝을 향한 새로운 달리기가 시작되는 순간이다.

분명 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마지막으로 갈수록 호흡은 안정되고 온몸이 일정한 리듬으로 땅을 딛고 밀어내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좀 더 뛸 수 있을 것 같았다. 분명 힘든데 더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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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질이 급하고 그런 주제에 과하게 신중해서 내적 갈등이 심한 나인데, 신기하게도 무언가를 딱 시작하고 쉼 없이 몰아붙이면 누구보다도 잘 참고 견딘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 이르면, 더 할 수 없을 것 같은데 이만큼 해온 게 보여서 분에 넘치는 인내력이 지구력으로 전환된다. 웃음이 나온다. 그냥 버티는 건 지구력이 아니라 인내일 뿐이다. 무언가를 계속하게 하고 다음을 있게 하는 건 지구력, 반복이 만들어온 일정한 리듬이다. 자연스럽게 눈이 감기고 얼굴이 땀에 젖은 것도 모른 채 열기와 바람의 만남을 즐기다 보면 또 완주해낸 내가 있다.



색색의 환대

이 마을에 머무르게 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범섬 앞인 것도 몰랐고 유채꽃이 만발한 동네인 줄도 몰랐다. 아니, 애초에 이 섬이 유채꽃으로 유명하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제주도를 그토록 좋아했음에도 나에게 유채꽃만큼은 할머니댁 근처인 낙동강변의 풍경으로 강하게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유채꽃의 노오란 빛은 나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세상이 내 마음 같지 않아서 늘 이방인처럼 겉돌던 나에게 나만의 취향과 개성을 갖는 건 살아남는 법이었다. 언제 어디서나 시선을 어디 두어도 노란빛을 볼 수 있도록 방을 꾸미고 크고 작은 생필품들을 노란색으로 채웠던 건 어떻게든 어딘가에 속하는 느낌을 받고 싶어서였다. 정말 몸만 있어도 노란색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색이라는 그 취향을 누구나 알 수 있도록, 어디서나 노란빛에 감싸여 스스로를 잃지 않을 수 있도록, 노란색이 들어간 옷이나 장신구를 사모으면서 많은 것을 견딜 수 있었다. 그리고 많은 마음들이 그런 나를 알아봐주고 지지하듯 노란 선물들로 다가오기도 했다. 그 선물들을 볼 때마다 얼마나 고맙고 기쁜지 모른다.


그러니 그 어느 때보다도 휴식과 위로가 필요할 때, 잔뜩 지치고 너덜너덜해진 몸과 마음을 끌고 대책 없이 찾아온 곳에서 만발한 유채꽃을 본 내 기분이 어떠했을까. 아마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곳을 소개해준 아빠도 몰랐을 테지. 그저 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질 수 있고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이 아름다운 섬으로부터, 이 바다로부터 환대받고 위로받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푸른 바다와 검은 바위, 노란 유채꽃이라는 가장 선명하고 아름다운 색 조합이 나를 매일 아침 맞아줄 거란 사실이 내가 이 낯선 해안을 단숨에 사랑하게 만들었다. 유채꽃이 지더라도 계속해서 사랑할 거라고 확신할 정도로 나는 환대받았다. 여기에서는 얼마든지 어디에든 겁 없이 걸터앉을 수 있을 것 같았던, 그 안정감과 벅차오름이 앞으로 노란빛을 볼 때마다 떠오르겠지.

그렇게 나는 또 하나의 살아갈 힘을, 빛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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