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일 차 : 늙은 왕벚나무, 기원의 이름 청명

특별하지도 평범하지도 않은, 조용하게 별난 대학원생의 85일간의 제주산책

by 여현

늙은 왕벚나무


한라산 등지에 자생하는 왕벚나무는 한국의 재래종이다. 평화로에는 크고 두꺼운 고목들이 줄지어 있는데 늙었지만 힘차게 큰 벚꽃을 피어내는 왕벚나무들의 활력이 어마어마하다. 아주 오랜 세월 동안 꽃을 피우고 떨어트리고 열매를 맺기를 반복해온 나무의 나이테에는 어떤 이야기가 새겨져 있을까? 우리가 매년 돌아오는 봄을 또 사랑하고 즐기듯 나무도 매년 피워내는 꽃을 지겹거나 뻔한 것으로 느끼지는 않을 것 같다. 어떤 마음으로 나무가 꽃을 피우고 떨구기를 반복하는지, 매년 어떤 다른 경험을 하며 그 자리에서 가지를 흔드는지, 다 나이테에 새겨져 있지 않을까? 올해는 비가 충분히 내려주었다, 그런 내용이라도.


아마도 어제가 올해 나의 마지막 벚꽃 구경이 아니었을까 싶다. 제주도는 벚꽃이 빨리 피고 지니까, 특히 서귀포는 더더욱. 내가 돌아갈 때쯤이면 집앞의 아름다운 벚꽃 축제도 끝난지 오래겠지. 가장 먼저 핀 벚꽃을 구경했고 흩날리는 꽃잎 하나는 내 손바닥에 잠시 머물렀다. 언제나처럼 나에게 의지와 인연을 달라는 소원을 빌고 후 하고 불어 다시 날려 보냈다. 잡아두지 않고 보내주어야 나의 소원이 이루어질 것 같았다. 이곳의 바람에게 배운 기원의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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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의 이름, 청명


이 섬에 와서 내가 하는 일이라고는 흐르는 시간을 몸으로 느끼는 일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과학적이고 수학적인 계산은 못해도 감각적으로 느껴지는 바와 붙여진 이름들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다. 이를테면 썰물, 밀물, 만조 때의 수위 변화를 가늠하거나 예측하지는 못해도 이미 일어난 변화를 매일매일 시시각각 헤아려보며 계절이 바뀌어가는 흐름 자체를 음미하는 그런 순간들. 조금씩 달라진 해의 등장 시간이나 위치를 감지하고 사소한 변화와 이동을 관찰하며 하루를 시작하려는 그런 관심.


또는 한참로, 색달로 엉덩물계곡, 예래로, 산방로 등등의 이름들을 곱씹기. 어떤 의미와 이야기를, 혹은 어떤 명소를 담아낸 이름인지 궁금한 도로명주소 간판을 살펴보고 입속에 한 번 굴려보면 별 이유 없이 재미있다. 굵직굵직한 것 외엔 잘 몰랐던 절기와 날씨를 견주어보면 하루가 새롭기도 하다.

오늘은 청명. 말 그대로 하늘이 맑아지는 절기다. 건조해서 화재에 대비해야 하는 때이자 봄 농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때라고 한다. 어제보다는 구름이 있고 쌀쌀하지만 그래도 쾌적한 날이다. 올해 풍작과 풍어가 약속되기를 바란다. 절기는 기원의 이름이다. 또한 자연을 대하는 일이 아니더라도 우리 모두에게 끝없이 펼쳐진 맑은 하늘처럼 많은 진척이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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