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일 차 : 거리와 소리, 굴러온 새순

특별하지도 평범하지도 않은, 조용하게 별난 대학원생의 85일간의 제주산책

by 여현

거리와 소리


새들은 조금만 다가가면 날아가버린다. 배염줄이에 새들이 모여 있으면 들어가지 않는다. 그들을 방해하고 싶지 않다. 도시의 비둘기는 너무 많은 자극 속에서 살아가기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되면 자리를 뜨지 않지만, 자연의 새들은 부스럭거리는 소리, 자신을 향하지 않는 발걸음, 말소리, 그림자의 변화에도 날아오른다. 어떤 거리를 유지하겠다는 듯이 이 바위에서 조금 뒤의 저 바위로, 그 뒤의 바위로 자리를 옮기는 새를 보면 미안해서 그냥 내 길을 가는 것뿐인데도 잠시 멈추고 다가가지 않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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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새들의 민감함과는 반대로, 나는 온갖 자연의 소리들로 가득한 이곳이 편하다. 경계할 필요가 없는 소리들이기 때문이다. 거리를 두고 지켜본다면, 내가 한심하게 뛰어들어 방해하거나 거스르지만 않으면 다 괜찮은 그런 소란. 반면 도시에서는 모든 소리가 피해야 하고 돌아가야 하는 위험 신호였다. 거리를 둘만큼의 공간도 없고 언제 무엇이 튀어나올지 모르니 알아서 피해야 했다. 다시 도시로 돌아가도 나는 잘 살겠지만 다른 소리를 찾아 헤매게 될 것이다. 분명히.



굴러온 새순


지난 두 달 동안 나를 기쁘게 했던 유채꽃이 시들어가기 때문인지 지난주부터 시에서는 해안공원과 올레길의 꽃밭을 재정비하고 있다. 제멋대로 막 자란 풀들을 잡초로 판단해 솎아내고 땅을 파 선인장이나 다른 꽃나무를 심었다. 그 가운데 아직 꽃이 피지 않아 정체를 알 수 없는 작은 꽃나무들도 올레길가에 자리잡기 시작했다.


사실 이미 2주 전부터 시작된 일이다. 그동안 연둣빛 새순이 점차 꽃봉오리의 형태로 변해가는 과정을 지켜봐왔다. 봉오리가 생각보다 천천히 돋고 있어 언제쯤 꽃이 필지 모르겠다. 알 수 없는 저 꽃이 피는 동안 유채꽃은 비바람에도 버텨낸 두 달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스러질 테지.


그러나 노란 꽃들이 진 자리에는 건물도 뒤흔드는 풍랑을 견딘 줄기가 더 단단하고 싱그러운 색으로 뻗치기 시작했다. 과연 이 줄기들을 시에서 그대로 남겨둘지는 모르겠지만 부디 남겨두길 바란다. 굴러온 새순이 박힌 줄기를 몰아내지는 않기를. 새로 돋는 꽃가지와 진한 녹빛 유채 줄기는 정말로 잘 어울리니까. 겨울을 지나온 그 단단한 의미가 오래도록 이 해안을 지켜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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