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하지도 평범하지도 않은, 조용하게 별난 대학원생의 85일간의 제주산책
한계 넘어서기 : 유년기
어제 드라마를 보다가 늦게 잤더니 평소보다 늦게 눈을 떴다. 늦은 시간까지 깨지 않고 자고, 눈을 떠서 개운함을 느끼고, 약에 의존하지 않고 잠들고 일어나는 일. 그런 게 얼마만인지 몰라 조금 기쁘기까지 했는데 '그럼 오늘 달리기 해, 말아?' 이 생각이 퍼뜩 들어서 제대로 기뻐할 틈도 없이 스트레칭을 시작해야 했다.
아침 대용으로 단호박식혜를 한 잔 마시고 준비운동을 철저히 하고서 집을 나섰다. 일어날 일을 알아서 긴장감이 맴돌았다. 20분을 쉬지 않고 어떻게 뛰지? 신이시여...
준비 달리기 5분을 마치고 너무 숨이 차서 오늘은 몸이 무거운가 걱정이 되었다. 연이어 20분 동안 달리면서 정말로 한계라고 생각되는 순간들이 몇 번이나 있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오늘도 완주했다. 다음 번은 무리일지도 모르지만 오늘은 어떤 한계를 확인했다. 달팽이가 자기 몸의 몇 배는 되는 면적의 결승선을 느리게 기어 완전히 통과할 때, 팡파레가 울리는 그 순간, 달팽이의 더듬이가 선 밖으로 튀어나간 아주 근소한 차이만큼, 딱 그만큼 나는 한계를 넘어섰다.
중학생 때였다. 교포였던 원어민 교사는 학생들을 미워했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그는 학생들을 그냥 싫어하는 수준을 넘어 호령하고 억누르고 싶어 했다. 그는 목소리가 작다는 이유로 내가 같은 문장을 몇 번이나 읽게 만들었었다. 아무리 목소리를 높여봐도 그의 기준에는 닿을 수가 없어서 목이 아팠다. 소심하고 목소리 작은 아이들은 소리 지르는 그에게 손쉬운 먹잇감이었다.
하루는 그 교사가 반 전체를 운동장에서 벌세웠다. 잘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수업에 집중하지 않았다거나 목소리가 작고 참여도가 낮았다거나 그런 사소한 이유였을 것이다. 잘못이 기억나지 않는 벌은 부당하다. 그날 부당하게도 우리는 영어 수업 시간에 운동장에 나가 달려야 했다. 몇 바퀴를 뛰어야 할지도 모르는 채로, 그것도 꼴찌를 하면 안 된다는 압박 속에서.
통통하다 못해 경도비만이었던 당시의 나는 몸이 무거웠고 목소리만큼이나 폐활량도 작았다. 그래서 고작 반 바퀴쯤 뛰다가 안 되는 영어로 더듬더듬 거짓말을 했다. 아프다고, 의사가 달리면 안 된다고 했다고. 나는 숨이 차서 터질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고갯짓으로 교실로 돌아가라고 했다. 그 순간에도 그는 권위적이었다.
교실로 돌아가니 천식이 있는 친구가 홀로 앉아 있었다. '너도?' 그 순진한 물음에 숨이 막혔다. 그 친구와 달릴 수 없음에 대한 거짓된 대화를 나누는 동안 내 손은 불씨를 맨손으로 잡은 것처럼 화끈거렸다.
그 뒤의 상황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날의 거짓말들이 오래도록 내 안에 부끄러운 기억으로 남아있었던 모양이다. 더는 못 뛰겠다, 오늘은 포기하자, 그런 속삭임이 머릿속에 휘몰아칠 때 이 유년의 기억이 내가 버텨낼 이유가 되어주었다. 내 몸에 대한 나의 경멸을, 부끄러움을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의 달리기는 한계를 넘는 도전이 되었다.
누가 나 같은 사람이 이렇게 달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까? 근데 해냈다. 장하다, 대견하다.
기진맥진해서 하늘을 올려다보니 구름 한 점 없이 푸른 하늘이 아무것도 비추지 않은 채 빛을 산란시키고 있었고, 나는 이제 부끄럽지 않게 그날의 기억을 이야기할 수 있다.
볕과 그늘
요즘은 물이 많이 차오르지 않아서 바다보다 길에 가까운 바위들이 바싹 말랐다. 뜨거운 볕에 말라버린 바위에는 이끼도 자라지 않는다. 바다가 물러난 자리에 드러나던 녹지대의 면적이 줄었고 파도에 밀려온 갈색 해초 무더기도 저만치 먼 곳에 쌓였다. 해수면이 높을 때가 그리워 비를 기다리게 되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뜨거운 볕이 불러낸 생명력에 녹빛이 된 바위틈 호수들에서만 볼 수 있는 색이 있어 그 맑은 녹색 호수를 하염없이 바라보기도 한다. 그럴 때면 비가 오지 않았으면 싶다.
오늘은 바람이 차고 해가 뜨거워 닫힌 실내의 공기가 쉽게 데워지는 그런 날이다. 반면 뜨겁게 달아오르다가도 그림자가 드리우자 순식간에 식어버리는 바위는 생각보다 변덕스럽다. 누가 바위더러 올곧다고 했는가. 이렇게 역동적인 존재인데. 해는 점점 길어져가고 밤공기는 상대적으로 더 차다. 이젠 더워지니까 앞으로는 저녁을 좀 늦게 먹고 천천히 나올까? 햇빛에 다리가 뜨거우니 그만 일어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