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일 차 : 사라지다, 걸으멍 달리멍, 검은 해변

특별하지도 평범하지도 않은, 조용하게 별난 대학원생의 85일간의 제주산책

by 여현

사라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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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라는 건 사라지기도 해야 아름답다. 또렷하기만 해서는 그저 폭력일 뿐이지만 사라지고 다시 그어지는 유동성을 가질 때 경계는 그 어떤 선보다 아름다운 공간이 되고 장소가 된다. 오늘의 수평선이 그렇다. 흐릿해서 하늘과 바다가 잘 구분되지 않는다. 사라진 경계선을 가늠하며 그 위를 두 손가락으로 걸어보기도 했다. 이럴 때마다 설문대할망이 떠오른다. 어떤 이야기가 삶에서 계속해서 떠오른다는 것은 그 이야기의 허구성이 현실과 뒤섞여 있다는 뜻이 아닐까. 누군가는 설문대할망이 허구일 뿐이라고 말하겠지만 내 삶에서 그는 내 먼 뿌리이고 이 세상의 시작이며 최초의 경계를 그은 자로서 실재한다.


하늘과 땅을 가르고 그의 치마폭에서 떨어진 흙으로 산을 세운 거인. 그는 가르고 만들고 부수는 자이고 끊임없이 경계를 창출하는 아름다운 자이며 인간의 욕심으로 격하되고 사라져 갔음에도 다시 이야기 속에서 먼 미래의 삶으로 침투해오는 친밀한 영혼이다.

내 삶이 아름다울 수 있는 길은 분명 이야기에 있다. 삶의 길과 내가 살아가는 이야기의 뼈대는 허물어지고 다시 세워지고 그렇게 빛날 수 있다. 설문대할망은 매번 나에게 자연의 언어로 그것을 일깨운다. 상기된 뺨을 스치는 바람의 속삭임으로, 손끝을 따라 밀려오는 파도의 울음으로, 흔들리는 가지와 젖은 날개를 떠는 나비의 몸짓으로, 햇빛에 마르는 현무암의 짠내와 수수꽃다리의 향기로.



걸으멍 달리멍


바닷가를 따라 걷고 점심을 먹고 작은 마을을 한 바퀴 돈 후에 굳이 버스를 마다하고 도로변을 따라 옆 마을의 시내로 향하는 먼 길을 함께 걷는 동안 친구가 말했다. 일이 아닌 다른 이유로 지칠 수 있어 좋다고. 내가 열심히 달린 이유도 그와 같아서 무척 공감이 되었다. 매일같이 앉아서 일하고 공부하는 우리라서 몸을 크게 움직이고 여러 장소를 오가는 길 위에서 지쳐가는 일이 드물었다. 갇힌 공간에서 옴짝달싹 못하는 채로 망가져가는 일상이었지. 나는 그래서 걷는 걸 좋아했었고 이 섬에서는 맨몸으로 가장 먼 거리를 이동하는 운동인 달리기를 했다.

앉거나 누워있는 동안 목, 어깨, 등허리에 쌓이는 피로는 말 그대로 누적되어서 몸을 망가트리고 그 자리에 주저앉게 만든다. 벗어날 힘조차 빼앗으며 무거운 짐짝처럼 얹어진 피로는 무기력이 되고 그때의 나는 눈을 감는 것 외엔 다른 도피처를 찾을 수 없었다. 그곳을 도무지 벗어날 길이 없었다.


그러나 마지막 힘을 짜내 몸을 일으켜 먼 거리를 걷고 달리기 시작하자 그 무엇도 내 몸 위에 다시 쌓이지 못하고 튕겨나가 흩어진다. 바람에 흩날리고 햇빛에 마른다. 마치 널어놓은 빨래의 물기처럼 피로는 깨끗함만을 남기고 공기 중으로 증발한다. 땀을 씻어낼 때 땀방울에 섞여 흘러나온 고통, 불안, 초조도 씻겨나간다. 일상의 부산물들을 날리려면 앉거나 누워있는 자세를 벗어나 움직이면 된다. 바람을 맞고 볕을 쐬고 걷거나 달리면 된다. 그 무엇도 몸에 쌓여있지 못하게 온몸을 흔들며 즐겁게 춤을 추면 된다.



검은 해변


걷고 또 걷다가 검은 해변에 도착했다. 모래가 거뭇거뭇해서 깜짝 놀라 뛰어가 보니 곱게 갈린 짙은 색의 모래가 해안을 채우고 있었다. 현무암이 바스러져 모래가 된 것일까 하고 생각하며 뛰어다니다 올라가서 보니 강에서 떠내려오며 마모된 현무암과 해안가의 수중화산들로 인해 만들어진 현무암이 부서져 모래사장을 이루었다고 적혀 있었다. 젖어서 짙어진 모래사장은 봤어도 모래가 온통 검은빛인 해변은 처음이었다. 벌도 아니라서 손바닥으로 쥐었더니 모래가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꼭 진흙 같은 색이지만 알알이 흩어지는 모래. 근처에 씻는 곳만 있었다면 신발을 벗어던지고 싶을 만큼 감촉이 좋았다.


해변 입구 중 한 곳에는 파도에 휩쓸려온 나무 조각들을 하나씩 주워와 달라고 적혀 있을 정도로 이 검은 해변에는 유목이 많았다. 꼭 누군가가 다듬어서 바다로 띄워 보낸 양 반듯한 나뭇가지들, 그리고 모래 틈에 쌓인 나뭇잎들. 바닷속에 숲이 있고 누군가 거기서 가지와 이파리들을 꺾어 보내는 게 아닌지. 소설로 쓰고 싶은 소재들이 잔뜩 있는 해안을 또 하나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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