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일 차 : 아침잠, 하루살이, 휴식의 제단

특별하지도 평범하지도 않은, 조용하게 별난 대학원생의 85일간의 제주산책

by 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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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잠


잠이 늘었다. 아직 악몽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아침에 좀 더 잘 수 있게 되었다. 흐린 날에는 일찍 일어날 이유가 없어서 빗소리를 들으며 계속 누워있을까 했는데 참을 수 없이 잠이 쏟아졌다. 아침을 챙겨 먹고 놀다가 다시 잠들고 또 잠들고 그러는 사이 날이 개었다.

온통 희뿌였던 세상이 다시 알록달록 해졌다. 단잠을 자고 기지개를 켜는 내 모습이 꼭 겨울잠에서 깨어난 개구리 같다.



하루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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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에 비가 많이 와서 여기저기 웅덩이가 고여 있었지만 언제나처럼 강한 태양이 땅을 굳혀주고 바위를 말려주어서 올레길을 안전하게 걸을 수 있었다.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계속 망설이고 주저하면서도 앞으로 나아갔다. 영화나 게임에서나 보던 모습처럼, 바위와 나뭇가지에 기대어 경사지고 위험한 길을 미끄러지지 않고 오르내리면서 가본 적 없는 곳으로 계속 향했다.


동글동글한 돌과 파도에 휩쓸려온 나뭇잎이 발을 미끄러트리고 잡아당기는 길 위에서 작은 게가 돌 틈을 파고들고 녹색 이끼가 바위를 뒤덮고 있었다. 내가 어릴 적 꿈꾸었던 바다와 바위, 산이 어우러진 길. 그런 곳에 집을 짓고 살아가고 싶었다.


나는 오래된 자연의 많은 것을 두려워하고 꺼려했지만 마지막에 내 걸음을 돌려놓은 건 경사진 바윗길도, 젖은 흙도, 야생화를 맴도는 벌도, 바위틈의 갯강구도 아니었다. 하루살이떼였다. 가장 짧은 생을 지닌 그 무리가 주저하면서도 계속해서 나아가던 내 걸음을 멈춰 세웠다. 주변을 둘러보느라 잠시 멈추게 한 것이 아니라 아예 뒤로 돌아세웠다. 아주 오랫동안 저 길을 이루어온 모든 것들에는 피할 수 있는 위험들이 가득했지만 나무 터널 입구의, 오늘만 사는 하루살이떼는 위험하지 않아도 피할 수가 없다. 반드시 사이를 뚫고 지나가라는 듯 버티고 있어서 미련 없이 걸음을 돌렸다.

길을 내어주는 법은 긴 세월 동안 깨우쳐야 하나 보다.


휴식의 제단


올레길을 타는 사람들의 복장은 비슷비슷하다. 등산복이나 골프복 같이 통기성이 좋은 기능성 옷차림에 챙 넓은 모자를 쓰고 스카프를 두르거나 종아리까지 오는 양말을 신기도 한다. 먼 거리를 걸어가기 때문에 만반의 준비를 한 그들과 달리, 집 앞 산책을 나선 것이나 다름없는 나는 평소와 같이 편한 복장이었다. 물 대신 삼각대를 들고 돌아다니는 내가 다소 험한 올레길에 들어서기 위해 신경 쓴 거라곤 밑창이 둥글지 않은 러닝화로 갈아 신고 온 것뿐이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자꾸만 관찰자가 되고는 한다. 사람들이 주로 몇 명이서 함께 다니는지, 짝수가 많은지, 홀수가 많은지, 성비는 어떻고 나이대는 어떠한지, 어디서 쉬고 어디서 멈추며 어디서 사진을 남기는지. 그런 것들을 지켜보았다.

올레길 곳곳에는 걷는 이들이 세운 돌탑이 있는데 오늘은 누군가 귤을 놓고 갔다. 참 재미있는 사람이다. 내가 길을 돌아오며 만난 이들 중 누구였을까? 유난히 챙이 넓은 모자를 쓴 아주머니? 무거운 사진기를 들고 꽃을 찍던 아저씨? 반바지를 입고 홀로 걷던 청년? 또래들로 보였던 친구 무리?

저 귤들을 지친 후발주자에게 남겨준 것인지 아니면 새나 동물들에게 남긴 것인지 궁금했다. 혹은 돌 대신 썩어갈 귤을 제단에 세우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돌탑도 바람에 무너지는 줄은 모르고 사라져야 이루어지는 어떤 기원을 귤에 담아 가지런히 놓아두었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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