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일 차 : 돌아갈 곳, 흔적도 남기지 않고

특별하지도 평범하지도 않은, 조용하게 별난 대학원생의 85일간의 제주산책

by 여현

돌아갈 곳

어젯밤 너무 늦게 자서 새벽에 달리러 나가는 대신 다시 눈을 감았더니 순식간에 한 시간이 지나갔다. 일어나 아침을 챙겨 먹고 스트레칭을 하다가 온라인으로 진행되는 논문 발표에 참석했다. 발표하는 친구들, 선후배들을 보니 마음이 짠했다. 다들 얼마나 힘들게 준비를 해왔을까, 저 자리에 내가 서 있던 날도 있었다. 그때 나는 많이 힘들었지만 좋았다. 논문을 쓰는 일이 좋았다고 말하면 모두들 눈을 동그랗게 뜨거나 흘겨보면서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했었지만 그래도 나는 정말 행복했다. 끝날 때가 되자 두렵고 힘들어서 더는 견딜 수 없어졌을 정도로 말이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와 소설에 대해 자유롭게 분석하고 쓰는 과정이 좋았다. 몰입할 수 있고 누구에게든 '논문 쓰는 중이야.' 하면 다 되던 그런 날들. 아무도 내 일상에 대해 덧붙이지 않고 나 또한 그랬던 날들. 그 후의 내 미래를 다시 생각하게 되자 그동안 모른 척 참았던 아픔들이 터져 나왔다. 끝없이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내 마음의 밑바닥에서 1년을 보내고 나는 여기에 왔고 이전보다 잘 살고 있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문명의 힘을 빌려 오랜만에 내가 속했던 세계를 엿보니 모두 반갑고 그립고 그랬다. 물론 약간 답답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우는 소리보다는 다시 돌아가야지, 힘을 내야지, 하는 다짐이 앞선다.


어제 산책을 하다 산길에서 국가지정번호 표지가 풀들 사이에 예쁘게 어우러져 있는 걸 보고 오랜만에 이 번호들로 복권을 사볼까 싶었다. 마침 금요일이니 잘 조합해서 한 번 걸어봐야지.(하지만 집 근처에서 복권을 사려면 산책로가 아닌 다른 방향으로 한참 걸어가야 했으므로, 결국 나는 복권을 사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다시 복권에 관심이 가는 걸 보니 미래라는 것이 다가오는 게 맞나 보다. 하지만 역시, 이제는 주저되거나 싫지는 않다. 내가 있었던 그 세계가 돌아갈 곳이라는 생각은 변치 않았고 그곳에서 다시 이곳을 돌아갈 곳으로 생각하겠지. 내가 속한 세계가 넓어졌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흔적도 남기지 않고


한때 유채꽃으로 가득했던 땅이 빈 공터가 되었다. 저녁에 달리기를 하러 나갔더니 어제까지만 해도 길가에 어지러이 흐트러져 있던 꽃이 져버렸다. 줄기만 남은 유채와 시들어가는 라일락, 이름 모를 관목들도 사라진 후였다. 세 달 동안 만개했던 꽃이 시들어가니 밀고 새 꽃나무를 심을 계획인 모양이다. 점점 말라가고 있었으니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만발했던 꽃들이 지고 이젠 남은 줄기조차 흔적도 없이 사라져 가니 마음이 허했다.


떠날 날이 다가오고 있다. 새로운 여정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정리부터 해야 한다.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머리로 안다고 해서 몸과 마음까지 그대로 납득하는 건 아니니까. 나를 반겨주었던 노란 꽃들이 사라진 길을 숨이 차도록 달리고 만세를 하며 고개를 돌리자, 어두컴컴한 바다가 모든 것을 삼킬 기세로 넘실대고 있었다. 때가 되었다고 경고하는 듯이, 고여 있는 것들을 다 삼켜버리겠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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