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일 차 : 바다 산 계곡 밭, 서로의 집, 서건도

특별하지도 평범하지도 않은, 조용하게 별난 대학원생의 85일간의 제주산책

by 여현

바다 산 계곡 밭

더 멀리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가보지 않은 곳까지 멀리멀리. 바다에서 출발해서 산을 타고 계곡을 지나 밭길을 따라 큰길로 나왔다. 거기서 조금만 더 가면 강정마을이지만 입구까지 간 걸로 충분했다. 무엇보다 서건도 부근을 지나 마을로 가는 길은 리조트들이 있어서인지 잘 닦여 있어서 크게 관심이 가지 않았다. 언제든 걸을 수 있는 길보다 걸어본 적 없는 산길이 더 좋았다.


바닷가의 산길은 재미있다. 나는 새들이 귓가에서 지저귀는 깊은 산속을 걷고 있는데 파도소리도 끊이지 않고 들어왔다. 산, 들, 바다, 강, 논밭, 도로, 마을 모든 것이 다 있는 곳. 사막을 연상시키는 황무지만 있으면 내가 집터로 꿈꿨던 지형이다. 욕심이 많아 어른이 되면 다 가지고 싶고 만끽하고 싶었던 사춘기 시절이 떠오른다. 그러면서도 모든 걸 이룰 만큼 어른이 될 수 있다는 자신은 없다 보니 늘 뚱한 표정이었지. 나뭇가지 사이로 밀려오는 바다에 그 뚱한 표정을 흘려보내고 탄성을 질렀다. 비틀거리면서 바위와 흙을 밟아 부어오른 발, 당기는 종아리, 힘이 들어간 허벅지가 선명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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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의 집


그동안 벌레에 내성이 생겼다고 생각했는데, 눈앞에서 덜렁이는 송충이에는 못 당하겠더라... 송충이를 피해 나무 아래가 아닌 바윗길로 돌아가려는데 바위틈엔 갯강구가 우글거리고 주변엔 하루살이와 각다귀가 떼를 지어 다녀서 여러 번 소리를 지르며 산길을 통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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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내 집에 벌레가 들어오는 게 싫듯이 저들도 내가 자기들 사는 곳을 휘젓고 다니는 게 싫겠지. 그러니 최대한 모른 척 돌아가는 편인데 오늘은 벌레가 많아도 너무 많다. 날이 좋으면 사람만 신나는 게 아니라 벌레도 신나는구나. 이런 데서 우리의 공통점을 발견하고 싶지 않았는데, 또 그렇게 생각하니 그러려니 싶어 져서 스스로를 다독이듯 심호흡을 했다. 물론 하루살이가 입에 들어갈까 봐 마스크를 올리고서.


그런데 송충이만큼은 정말 못 견디겠다. 거미줄 같은 줄에 기대어 나무에 대롱대롱. 딱 내 눈높이에...



썩은 섬, 서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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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척박해서, 잘 썩는 응회암으로 이루어져서, 혹은 바다가 갈라지기 전에 물로 돌아가지 못한 고래의 사체가 풍화되어간 섬이라서, 다양한 이유로 '썩은 섬'으로 불렸다는 서건도. 서건도 앞바다는 흔히 모세의 기적이라고 칭해지는 바다 갈라짐 현상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서건도까지 이어진 바윗길은 매일 다른 시간에 열리고 닫힌다. 한 달에 열 번 정도 길이 생긴다는데 내가 갔을 때는 딱 바다가 갈라진 때였다. 먼 옛날의 고래처럼 미처 깊은 바다로 돌아가지 못한 생명은 없었으면 했다.


저 멀리 내려앉은 해무 탓에 흐릿한 범섬, 비교적 선명한 서건도와 강정포구가 한눈에 들어온다. 먼 거리를 그다지 높지 않은 곳에서도 다 볼 수 있다는 건 축복이다. 그런 탁 트인 시야는 도시에서는 허락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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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평 선 뿐인 바다라면 어디의 바다인지 잘 알 수 없다. 그래서 범섬은 내 추억의 중추다. 기억 속 수많은 바다들과 이곳의 바다를 갈라놓는 커다란 바위호랑이의 존재감. 반면 아름다운 만의 수평선을 반 이상 가려버린 해군기지는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여기에서만큼은 그저 수평선과 서건도만을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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