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2.07 필사
행동경제학의 가장 유명한 실험 가운데 하나인 최후 통첩게임을 예로 들어보자. 이 실험은 보통 두 사람을 대상으로 한다. 둘 중 한사람에게 백 달러를 주고 그 돈을 다른 한 사람과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나눠갖게 한다. 전부 자신이 생길수도 있고, 대부분 줄수도 있다. 다른 한 사람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나눠주는 돈을 받던지, 아니면 아예 한푼도 받지 못한다. 고전 경제학 이론들은 인간이 이성적인 계산기계라고 주장한다. 그 이론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99달러를 갖고 나머지 1달러를 다른사람에게 줄 거라고 예측한다. 이성적인 사람이라면 1달러가 공짜로 생긴다면 두말 할 것 없이 수락 할 것이다. 상대방이 99달러를 받든 말든 무슨 상관인가? 아마 고전경제학자들을 실험실과 강의실을 떠나 현실세계를 몸소 겪어본 적이 없엇을 것이다. 최후통첩 게임에 참여한 사람들 대부분이 낮은 액수의 분배제안을 ‘불공평하다’는 이유로 거절한다. 그들은 상대방에게 만만한 사람으로 보이는 것보다 1달러를 잃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실제세계는 이런 식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애초에 상대방에게 아주 낮은 액수를 제안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돈을 똑같이 나누거나, 자신이 조금만 더 갖고 30~40달러를 상대방에게 준다. 최후통첩 게임은 고전경제학 이론에 타격을 가했고, 지난 몇십년동안의 가장 중요한 경제적 발견에 큰 기여를 했다. 바로 사피엔스들은 냉정한 수학적 논리를 따르기보다는 훈훈한 사회적 논리에 따라 행동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감정의 지배를 받는다. (중략) 이렇듯 불공평한 제안을 거절하는 이유는, 불공평한 제안을 순순히 받아들인 사람들이 석기시대에 살아남지 못했기 때문이다.
파라오의 이집트, 유럽의 제국들, 현대 교욱제도 같은 인간의 막강한 조직들이 꼭 실제를 명료한 눈으로 볼 필요는 없다. 그들의 힘은 자기들의 허구적 믿음을 순종적인 실제에 강요하는 능력에서 나온다. 돈이 바로 그런 경우이다. 정부는 무가치한 종잇조각을 만들어 그 가치를선언한 다음, 그 종잇조각을 이용해 다른 모든 것의 가치를 계산한다. 정부는 시민들에게 이 종잇조각을 이용해 세금을 내라고 강요할 힘이 있고, 따라서 시민들은 어쩔 수 없이 그 종잇조각들을 조금이라도 가져야 한다. 그 결과 지폐들은 실제 가치를 갖게 되었고, 정부 관료들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이 입증되었고, 정부가 지폐발행을 통제하는 한 정부의 힘은 계속 커진다.
허구는 나쁜 것이 아니다. 허구는 꼭 필요하다. 돈, 국가, 기업 같은 허구적 실체에 대한 널리 통용되는 이야기가 없다면 복잡한 인간사회가 제대로 돌아갈 수 없다. (중략) 하지만 이야기는 단지 도구일 뿐이다. 이야기가 목표나 잣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이 단지 허구임을 잊을 때 우리는 실제에 대한 감각을 잃게 되며, 그때 우리는 ‘기업을 위해 많은 돈을 벌려고’ 또는 ‘국익을 보호하려고’ 전쟁을 시작한다. 기업, 돈, 국가는 우리의 상상에만 존재한다. 우리는 우리를 도우라고 그것들을 발명했다. 그런데 왜 그것들을 위해 우리의 생명을 희생하는가?
과학이 잘 작동하는 제도를 만들기 위해서는 종교의 도움이 항상 필요하다. 과학자들을 세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연구하지만, 인간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결정하는 과학적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과학은 우리에게 인간이 산소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하지만 범죄자들을 질식시켜 처형해도 괜찮은가? 이런 질문에 어떻게 답해야 하는지 과학은 알지 못한다.
2014년 여름 서아프리카에 에볼라가 발생했을 때 에볼라 치료제와 백신을 개발하는 제약회사들의 주식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는가? 주가가 폭등했다. 테크미라의 주식은 50퍼센트 올랐고, 바이오크리스트의 주식은 90퍼센트나 뛰었다, 중세사람들은 역병이발생하면 하늘을 쳐다보며 신에게 자신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발었다. 오늘날 치명적인 새 유행병이 발생했다는 소식이 들리면, 사람들은 휴대폰을 붙들고 주식 중개인과 통화한다. 주식거래에는 유행병조차 호재이다.
여우의 경제는 여우들이 더 많은 토끼를 생산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성장이 불가능 하다. 토끼의 경제는 토끼들이 풀을 더 빨리 자라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정체된다.
세계를 크기가 고정된 파이로 보는 전통적인 세계관은 이 세계에 오직 두 종류의 자원만 존재한다고 본다. 바로 원재료와 에너지이다. 하지만 실은 세 종류의 자원이 존재한다. 원재료, 에너지 그리고 지식이다. 원재료와 에너지는 고갈된다. 사용하면 사용 할수록 줄어든다. 반면 지식은 성장하는 자원이다. 사용하면 할수록 늘어난다. 실제로 당신이 지식의 총량을 늘리면 그 지식은 당신에게 더 많은 원재료와 자원을 준다. 내가 알레스카에서 석유를 탐사하는데 1억달러를 투자해 석유를 발견한다면, 나는 석유를 더 많이 갖지만 내 손자들은 자보다 석유를 적게 가질 것이다. 만면 내가 태양에너지를 연구하는 데 1억달러를 투자해 태양에너지를 이용하는 새롭고 더 효율적인 방법을 발견한다면, 나는 물론 내 손자들도 더 많은 에너지를 가질 것이다.
수천 년 동안 과학의 성장로가 막혀있었던 것은 사람들이 세상에 관한 모든 중요한 지식이 성경과 고대 전통에 담겨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전 세계 유전들이 이미 다 별견되엇다고 믿는 회사는 석유를 탐사하는 데 시간과 돈을 낭비하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문화는 새 지식을 찾는 수고를 하지않는다. 이것이 전근대 인류 문명 대부분의 입장이었다. 과학의 가장 위대한 발견은 무지를 발견한 것이었다. 세상에 대해 아는 것이 얼마나 없는지 깨달았을 때 비로소 인간에게 새 지식을 찾아나설 매우 타당한 이유가 생겼고, 이것은 진보를 향해가는 과학의 길을 열었다.
현재의 조건에 꽤 만족한다 해도 당신은 더 많이 갖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어제의 사치는 오늘의 필수품이 된다. 전에는 방 세 칸짜리 아파트와 자동차 한대 그리고 데스크톱 컴퓨터 한 대로 잘살 수 있었다 해도, 지금은 방 다섯 칸짜리 집과 두대의 자동차 그리고 아이팟, 태블릿 PC, 스마트폰이 세트로 필요하다.
역사에서 예언자들과 철학자들은 인간이 장대한 우주적 계획에 대한 믿음을 버리면 모든 법과 질서가 무너질 거
라고 주장해왔다. 하지만 오늘날 전 세계의 법과 질서에 가장 큰 위협이 되는 존재는 신과 신의 모든 것을 아우르는 계획을 계속해서 믿는 사람들이다. 신을 두려워하는 시리아는 세속적인 네덜란드보다 훨씬 더 폭력적인 곳이다.
무의미하고 무법적인 존재에게 해독제를 제공한 것은 인본주의였다. 인본주의는 지난 몇백 년동안 세계를 정복한 혁명적인 새 교리이다. 인본주의라는 이 새로운 종교는 인류를 숭배하고,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에서 신이 맡던 역할, 불교와 도교에서 자연법이 맡던 역할을 인류에게 요구한다. 과거에는 장대한 우주적 계획이 인간의 삶에 의미를 부여했다면, 인본주의는 역할을 뒤집어 인간의 경험이 우주에 의미를 부여하도록 한다. 인본주의에 따르면, 인간은 내적 경험에서 인생의 의미뿐 아니라 우주 전체의 의미를 끌어내야 한다. 무의미한 세계를 위해 의미를 창조해라. 이것이 인본주의가 우리에게 내린 제1계명이다.
중세유럽: 지식= 성경x논리
과학혁명: 지식= 경험적 데이터x수학
인본주의: 지식= 경험x감수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