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조용해진 날에

by 유라

나는 여전히 눈 오는 날을 좋아한다.

보통 성인이 되면 슬슬 눈이 오면 겪게 되는 불편함 때문에 싫어지기 마련인데, 눈을 보면 지금도 아이처럼 돌아갈 때가 있다.

당연히 과유불급이라고, 너무 많이 오면 부담스럽긴 하다. 특히, 길 위라면 아주 많이 힘들다. 차가 밀리면서 도착지에 가는 시간이 1분, 2분씩 길어지니까. 그럴 땐 눈이 가끔 미워지기도 하지만 그래도 눈이 여전히 좋다. 그리고 지금도 눈을 좋아하는 큰 이유는 보고 있으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계절이 바뀌어 다시 눈을 볼 때까지 살아냈다는 사실이, 괜히 대견하게 느껴지기도 하다.

그리고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심리적인 것이겠지만 눈이 오면 시끄러웠던 소음들도 볼륨을 한껏 내린 것처럼 조용해지는 느낌이 든다. 그러면 내 마음은 더 차분해져 따뜻한 차 한 잔을 찾게 될 때가 있다.

아주 옛날 한 겨울에 제주도를 놀러 간 적이 있다. 3박 4일 일정이어서 느긋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빨리 갔다. 눈을 감았다 떴더니 벌써 다음 날이면 다시 돌아가야 하는 날이었다. 오후에 아주 한가롭게 카페에 앉아 멍을 때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항공사에서 연락이 왔다.

대설 때문에 비행기를 취소했다고 양해를 바란다는 말이었다. 깜짝 놀랐다. 당시 다다음날 출근을 해야 했었는데 꼼짝없이 제주도에 갇혀버렸다. 그때부터 다음 날 갈 수 있는 비행기표를 찾아보았다. 하지만 대설로 모든 항공편이 취소돼 갈 수가 없었다. 해외를 경유해 돌아오는 방법까지 봤지만, 현실적인 선택지는 아니었다.

이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며 돌아갈 방법을 다시 찾았다.

창밖에는 눈이 멈출 기색 없이 내리고 있었고, 길 위의 사람과 차는 하나둘 사라졌다. 마치 세상이 멈춘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한참을 헤맨 끝에, 결국 배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일정은 엉망이었지만 출근을 해야 했기에 그 선택 말고는 다른 길이 없었다. 창 밖을 보며 하염없이 내리는 눈을 보니 왜 제주도에 와서 이러고 있어야 하는 건지, 제주도도 싫고, 눈도 싫어졌다. 빨리 다시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표를 예약하려고 봤더니 표가 실시간으로 사라지는 게 보였다. 다음 날은 아니었고 다다음날 목포로 가는 배편이었는데 점심 즈음에 배를 타면 목포에서 내려 다시 기차를 타고 집으로 가야 했다. 집에 도착하면 자정이 넘을 예정이었고, 바로 다음 날 출근을 해야 했다. 결국 그 배를 예약했고 묵고 있던 숙소를 1박 연장했다.

그러고 나니 한바탕 고요함이 밀려왔다. 비행기가 다시 운행하지 않을까 하며 마음 졸이면서 창 밖을 바라봤는데 상황이 정리되고 나니 그렇게 고요해 보일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나는 1박을 제주도에 더 머무르게 돼서 시간상 포기했던 방어와 고등어회를 사러 나갔다. 기회다 싶어 차까지 빌렸고 회를 사고 돌아오는 길에 사고가 날 뻔도 했지만 무사히 숙소에 돌아와 맛있게 회를 먹었다.

그리고 배도 부르고 등도 따시니 졸음이 몰려와 침대에 누워 창밖을 다시 보았다. 여전히 내리고 있는 눈이 참으로 예쁘게 보였다.

그날을 통해 하나 깨달은 것이 있다. 어떤 상황이어도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현재 상황이 좋을 수도, 싫을 수도 있다는 것을 마음속 깊이 깨달았다. 그때부터 선물처럼 하루가 생겼다고 생각하고 그날을 즐기기로 했다.

다음 날이 되니 언제 그랬냐는 듯 눈이 멈췄다. 근처 산책도 하고 좋아하는 식당도 한 번 더 갔다. 숙소 주변에서 놀며 피곤하면 들어가서 잠을 잤다. 그렇게 하루를 보냈더니 묵혀있던 피로가 눈 녹듯이 녹아내렸다. 하루라도 더 제주도에서 지낼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날에서야 마음이 상황을 바꿀 수도 있다는 걸, 처음으로 믿게 됐다.

그 이후로 나는 눈 오는 날을 조금 다르게 맞이한다.

불편함이 없지는 않지만, 눈이 오면 세상이 잠시 조용해진 느낌을 가만히 느껴보려고 한다.

오늘만큼은 서두르지 않아도 되는 날이라고, 나에게 허락해 주기 위해서다.


세상이 조용해진 날에

나도 조금은 느려져도 괜찮다는 것을, 눈은 늘 말없이 알려준다.

수, 토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