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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클레어 Oct 14. 2021

시작도 전에 쿨링다운

챕터1_잘 쉬어야 또 달릴 수 있다.

여행을 가기 전, 내 머릿속은 온갖 잡다한 생각들과 이런 저런 계획들, 미루고 미루던 크고 작은 일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와중에 여행계획을 세우고, 호텔을 예약하고, 비교하고, 일정을 짜고, 예산을 잡고, 식당을 알아보는 일등은 그야말로 일에 일을 더하는 과정이었다. 


다소 즉흥적이고, 여행 계획 세우는 것을 본디 좋아하지 않는 나의 성격이지만, 함께 사시는 분께서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 지를 모르고 다니는 것을 매우 힘들어하시고, 계획에 없는 일이 일어나는 것을 매우 싫어하시는 데다가 애 셋과 함께 하는 여행에 아무 계획없이 다니는 것은 그 자체로 재앙인지라, 나도 모르게 이것저것 나름 세심하게 계획을 짜게 되었다. 본디 성격은 이런 성격이 아니라, 이렇게 계획을 짜고 정해진 시간에 자고 일어나려면 그게 무슨 여행이냐고 생각할 성정이라 이미 계획된 여행은 로맨틱하지도 않고, 흥도 많이 떨어진다. 


그렇게, 한 남자의 아내이자, 세 아이의 엄마로 출발한 여행. 왠걸? 출발하자마자 기분이 겁나 좋아졌다. 여행지에 가까워올수록 텐션이 더, 더, 더 올라가서 동영상 찍고 난리가 났다. 우리집에서 텐션은 나혼자만 엄청 높은 편. 어딜가나 나만 활짝 웃고, 싱글생글, 말도 제일 많고, 매우 매우 매우 지나치게 긍정적인 편이다.


여행가는 길

우리 가족의 특성상 외부에 하루종일 있는 것을 아무도 좋아하지 않기에, (물론 이것도 나와 정반대이다. 나는 하루에 한번이라도 바깥바람을 쐬주고, 한 번 나갔으면 해가 질때까지 집에 들어오지 않고, 돈이 떨어지기 전까지 집에 들어오는 법이 없었는데... 4대1이니 내가 쪽수로 밀리니 다수의 의견을 존중하기로 했다.) 하루에 1 관광후 호텔에서 수영하고 저녁먹고 9시, 일정한 시간에 잠을 자는 것으로 일정을 갈무리했다.


역시나 흥도 떨어지고, 9시에 누워 눈을 감으며, 아.. 하루가 아깝다. 밖에 나가 할일없이 산책이라도 하자고 할걸그랬나 등등 온갖 즉흥적인 것들로 내 생각을 가득 채웠지만, 남편은 벌써 코를 골기 시작했고, 잘듯 말듯 했던 아이들도 이내 잠이 들었다. 그러다 눈을 떠보니 어느새 아침이었다. 나도 피곤하긴 했나보다. 


이번 여행은 우리 가족모두가 캐나다 음식에 많이 적응했는지, 2박3일동안 한식당에 한번도 안 갔는데도 누구하나 불평하지 않았다. 한식당이라는 옵션을 제외하고 보니 오히려 지역 맛집들을 시도해볼 수도 있었고, 리뷰를 충분히 읽고 간 로컬식당들은 기대이상의 맛을 선사해주었다. 너무 고마웠다. 보통 중간에 라면이라던지 김치라던지 등등 엄청 찾게 되어 있는데, 이번에는 달랐다. 심지어 싸갔던 라면과 햇반을 모두 다시 들고왔을 정도이니까. 


로켓버거

로컬 식당_햄버거 맛집_로켓버거

피쉬 앤 칩스

로컬식당_피쉬 앤 칩스


이런 음식만 2박3일을 먹었는데 김치 생각이 안나다니! 대견하다!


사실, 출발전에 온갖 생각들로 실타래 엉키듯 엉켜있고 이 모든 일들을 빨리 해결해야 한다는 압박감 속에서, 하지만 압도감은 느낄수록 나는 집착적으로 유투브와 넷플릭스를 오가며 간간이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에 이사진 올릴까 하다, 아니야 내가 사진 올릴때가 아니지, 겁나 바쁜데, 그러고 지우고 다시 유투브와 넷플릭스를 오가다 마침내는 넷플릭스에 안착하며 맥주한잔 마시고 그냥 자버리는 매우 낭비적이고 소모적인 하루하루를 보냈었다. 마치 과부하가 걸려 자꾸만 종료를 해야 하는 태스크를 완료를 못한채 다시 시작, 다시 시작하는 렉 걸린 컴퓨터처럼, 멈춘것과 진배없는 하루하루를 살던 나에게, 리셋 버튼을 누르는 시간이 되었던 것 같다. 


2박 3일동안, Ctrl+Alt+Del 누른 것처럼, 뇌는 순간 생각을 멈추었고, "Eat, Love, Pray"에 나오는 쥴리아 로버츠처럼, 먹고, 사랑은 안했고, 기도도 안했지만, 먹고, 놀고, 자고, 먹고, 놀고, 자고를 반복하다보니 이것도 해야지, 저것도 해야지, 분주하기만 하고 능률은 없던 뇌가 다시 깨끗해지면서 생각나는것, 할 수 있는것, 이것부터 해야지. 하며 다시 원래의 속도로 돌아온 듯한 느낌이 든다. 


여전히 해야 할 일들은 있고, 해결되지 않은 많은 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지만, 여행전에는 그 모든 것들이 정리되지 않은 서랍처럼 뒤엉켜, 내가 먼저입네, 하고 있었다면, 지금은 커텐 뒷편에, 정렬된 옷걸이들에 종류대로 걸려, 내가 골라 해야할 일, 할 수 있는 일을 취사 선택할 수 있도록 기다리고 있는 느낌이다.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해결해야 할 일이 없는 순간은 없을 것이다. 학원운영을 하면서도 그랬다. 결정을 해야할 일들이 수만가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깊이 생각해서 결정해야 할 일들도 많다. 인간의 삶은 언제나, 해야 할일, 긴급한 일, 꼭 해야 할일, 엄청나게 중요한 일등등 해결해야 할 일들이 연속적으로 일어난다. 하지만 어느 순간에는 우리가 모든 것을 멈추고 숨고르기를 해야 하는 순간이 있다. 그것은 수익에 약간의 상실을 초래할 수도 있고, 내가 쉬기에 다른 사람에게 불편을 끼치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쉬지 않고 달리다가 모든 것이 셧다운 되었을때 부담해야 할 모든 지출보다는 작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피아노를 사랑하게 된 이후로, 단 한번도 게을러진 적이 없다. 모든 여가 시간은 연습시간으로 대체가 되기에 늘, 밥만 먹고 연습해야지, TV 딱 1시간만 보고 연습해야지, 등등 모든 시간은 계획되고 관리하며 살아왔다. 내가 레슨을 쉬면, 그만큼 바로 수입에 지장이 생긴다. 레슨비는 월급이 아니라 시간당 페이를 받기 때문에 쉬면, 쉬느라 못 버는 레슨비+ 휴가비까지 생각해야 하는 식이다. 어찌보면 2배의 손실인 것 같기도 하다. 학원을 할 때는 그래서 선생님들과 돌아가면서 쉬면서 학원은 오픈하는 식으로도 운영을 했었는데, 막상 쉬는게 쉬는게 아니다. 문자/전화가 쉼없이 오니까. 하지만 이상하게 쉬는 게 죄스러운 느낌이었던 것 같다. 


이번에 1주일의 휴가를 내면서 내 뇌에 쿨링다운 된다는 느낌이 정말 신선하고 근사했다. 내가 돈을 포기하고 쉼을 선택했다는 점도 뿌듯하다. 사실, 피아노에 관한 글을 써보려고 생각했는데, 쉬기 전에는 생각만 맴돌뿐, 도저히 글을 쓸 기분도, 멘탈도 아니었다. 오늘은 여행다녀온 바로 당일. 나같이 모든 힘을 밖에다 쏟고 집에 들어와서는 녹초가 되곤 하는 성격과는 달리, 우리집 나와 다른 4명 때문에 오후 4시에 집에 도착. 이제 나는 우리가족 스페셜리스트이기 때문에 이런 일로 불평이나 후회는 없다. 내가 무리하게 움직였다가 가족 모두의 짜증과 후폭풍+온가족의 싸움을 경험하는 것은 달콤한 휴가 후에 겪을 일치고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이기에.. 여튼, 나는 에너지가 한참 남았고, 뇌가 리셋되고나니 이런저런 일들을 스트레스없이 받아들이게 된것 같다. 이렇게 글도 쓰게 되고... 


중요한 많은 일들을 앞두고 머릿 속이 복잡하다면, 모든 것을 내려놓고 다녀오는 여행이야말로, 그 일을 스트레스없이 몰입하게 만들수 있는 특효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쿨링다운 되었으니까, 워밍업부터 시작해볼까?

워밍업 1단계로 내가 고른 일은 바로 글쓰기. 아무래도 수다가 워밍업으로는 최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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