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순>, 양귀자, 쓰다
나는 베스트셀러를 잘 읽지 않는다. 베스트셀러 책은 출판사와 서점의 계략 같다. 그런데 어느 날 책 제목 <모순>이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가볍게 읽으려 했는데 나는 이미 안진진의 삶에 빠져있었다. 일란성쌍둥이인 엄마와 이모. 결혼 전까지 둘은 같은 외모, 같은 성격, 같은 말투, 같은 삶을 살았다. 하지만 결혼을 기점으로 둘의 인생은 정 반대로 흘렀다.
사진 한 장과 중매인 정보만 듣고 결혼했던 시절이다. 사랑은 없을지 몰라도, 그 외 조건은 확실하게 따졌을 것이다. 그런데 주인공 안진진의 아버지는 보통 잘못 고른 것이 아니었다. 알코올중독자였다. 거친 언행과 폭력을 일삼았다. 가산을 탕진했고 가출했다.
삶의 풍파 때문인지 안진진의 연애는 누구보다 진지했다. 두 남자를 열심히 저울질했다. 안진진이라면 나영규를 선택할 것이라 믿었다. 그리고 그 길을 응원했다. 그런데 어처구니없게도 모든 면에서 오답인 김장우에게 마음이 기울어있었다. 안진진은 엄마와 같은 길을 걸으려 했다.
딸은 아버지 닮은 남자와 결혼한다 했나. 자라온 환경은 대물림되나 보다, 그 궤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어떤 힘이 있나 보다.. 하며 씁쓸하게 읽었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으로 안진진은 이모의 자살을 계기로 나영규와 결혼한다.
나는 안진진의 마음을 분석해보고 싶다. 안진진은 과연 김장우를 사랑했을까?
안진진이 김장우를 사랑한다고 판단한 단서는 그에게 보다 나은 '나'를 보여주고 싶은 욕망의 발현이라 했다.
- 김장우는 가난하다. 빈털터리일 뿐만 아니라 친형에게 마음의 빚까지 지고 있다.
- 나영규는 번듯한 가정에서 자랐고 성실하게 회사 생활을 한다. 재산도 꽤 있을 것이다.
- 김장우는 안진진의 가족사를 모른다. 우연히 레스토랑에서 본 우아한 이모를 안진진의 어머니라 믿었다. 안진진은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다.
- 나영규는 안진진의 가족사를 모두 안다. 그를 끊임없이 시험대에 올려놔도 개의치 않는다.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찾는다.
- 김장우의 데이트 신청 전화는 매번 나영규보다 늦다. 데이트 계획도 없다. 한 번은 안진진이 나영규와 한 데이트 코스를 베껴 김장우에게 추억을 선물했다.
- 나영규는 완벽하고 치밀한 계획을 짠다. 예약은 물론이요, 분 단위 드라이브 코스를 짜며 안진진을 기쁘게 해 줄 궁리를 한다.
더 나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게 만든 것이라고? 그것은 변명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안진진은 김장우의 삶에서 위안을 얻었다. 안진진은 측은지심을 사랑이라 착각한 것이다.
얼마 전 유튜브에서 <김창욱쇼 2>를 보았다. '사랑은 무엇일까'에 대한 강연이었다. 그가 말하는 사랑은 '그래서'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했다.
누구나 고난과 역경 없이 상황이 순조롭다면 상대가 '이래서' 괜찮고 '저래서' 좋다. 하지만 그 감정은 사랑이 아니다. 문제가 생겨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와 함께하기로 마음먹는 것, 그것이 감정이 사랑이라는 강연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사람과 결혼해야 한다고.
김장우는 형수 몰래 형의 더러운 양말을 빨아줄 때 행복하다 했다. 안진진은 어느 날 자신도 김장우의 더러운 양말을 빨아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안진진이 선택한 최종 결혼 상대는 나영규다.
부끄러운 안진진의 가족사를 모두 아는 나영규.
오차 없는 나영규의 계획표에 자신이 어디까지 계획된 걸까 거북해했던 안진진.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진진은 나영규를 선택했다.
그렇다면 안진진은 나영규를 사랑했다 뜻이냐, 그건 아니다. 안진진은 현실과 타협했다.
안진진은 '재미없는 너희 이모부'의 이야기를 수없이 들었다. 나영규의 미래 모습은 곧 안진진의 이모부다. 이모는 엄마와 달리 삶에 고단함이 전혀 없었다. 그저 매끄럽게 잘 닦인 길을 걷기만 하면 됐다. 편했다. 그런데 삶에 낙이 없다. 그래서 자살했다.
이모가 왜 자살했는지 사촌 주리, 주혁이는 모를지언정 자신은 그 이유를 너무나도 잘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진진은 이모와 같은 길을 걸어보기로 했다.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내가 판단한 안진진은 영악한 사람이다. 25살 자신의 온 생애를 걸어야겠다 다짐한 그녀다. 그녀는 결혼 전에 자신이 취할 수 있는 마지막 자유를 누린 것이다.
안진진은 한 번도 온전한 자유를 가진 적 없다. 아버지의 주정과 폭력으로 집안은 늘 시끄러웠다. 그래서 이모네 집에 번번이 대피해야 했다. 이모 집에서는 갈치 살점을 발라 사촌에게 주는 이모부를 지켜보고만 있어야 했다. 엄마는 억척스럽고 행색이 부끄러웠다. 학창 시절 어머니 직업을 과장되게 적어냈다가 곤경에 처했다. 곤경에 처할 때면 이모에게 도움을 청했다. 남동생은 문제만 일으키고 다녔다.
안진진은 이 모진 상황을 굳건히 견디며 살았다. 자신이 여려질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자신을 '착하디 착한 우리 안진진'이라 불러주는 남자 김장우. 고작 그 한마디에 자신은 바위틈에서 피어난 어린 실풀꽃이 되었다. 아주 자그마한 마음의 안식을 준 남자가 김장우다. 안진진은 김장우를 사랑한 것이 아니다. 평생 결핍되었던 안정적인 삶에 갇히기 전에 일탈을 누리게 해 준 것이다. 앞으로는 없을 마지막 일탈을.
글유랑
초안: 2025년 5월 5일 월요일 오후 13시 23분
수정 1: 2025년 5월 5일 월요일 오후 6시 37분
수정 2: 2025년 5월 6일 화요일 오후 12시 40분
수정 3: 2025년 5월 6일 화요일 오후 9시 19분
수정 4: 2025년 5월 7일 수요일 오전 10시 07분
수정 5: 2025년 5월 9일 금요일 오전 10시 57분
수정 6: 2025년 5월 10일 토요일 오후 9시 12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