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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리 Dec 09. 2016

그리고 신은 엄마를 창조했다

김유리가 만난 지구인 22 _ 전업주부 곽혜순




‘엄마’라는 이름을 가진 모든 사람에게 ‘자식’은 아프고도 소중한 이름이다. 고통 없이 태어난 아이들이 어디 있으며, 비바람 맞지 않고 가정을 꾸린 주부 역시 어디 있으랴. 1956년생인 이 어머니는 질곡의 세월을 거치며 소담한 가정을 꾸려왔다. 목공 기술자로 전국을 누비는 남편의 빈자리에서 때로는 아버지의 역할을 대신하며, 때로는 넓고 따뜻한 품으로 아이들을 껴안으며 한 평생 오롯이 육아와 살림에 전념했다. 그녀가 낳은 두 딸 중 막내가 나의 지인이었다. 사회 활동가와 엄마의 역할을 척척 해내는 나의 지인을 보며 늘 그녀의 어머니가 궁금했고, 다양성 인터뷰를 핑계 삼아 드디어 그 어머니를 만났다. 






                

Q . 언제부터 전업주부셨어요?    


A . 1979년 1월 9일에 결혼하고 나서부터요. 스물다섯 살부터요. 시집오기 전에는 친정도 시댁도 잘 살았어요. 친정아버지는 군인이셨고, 시댁은 농방(가구 공장)을 했거든요. 리바트, 동서 가구 같은 메이커 가구들이 들어오기 시작하고 IMF겪으면서 가세가 많이 기울었어요. 그래도 우리 아저씨가 기술이 있으니까 공장장을 하기도 하고 목수 일을 하면서 절을 짓는 공사를 하러 다녔어요. 제주도 약천사, 대신동 내원정사 등 전국에 큰 절은 다 했어요.      



Q . 결혼 생활 하시면서 어려운 점은 없으셨어요? 


A . 내가 시집 온 지 6개월 만에 남편 동생이 돌아가셨어요. 애인이랑 횟집 갔다가 횟집에 불이 나서 질식사 하신 거지요. 가세도 기우는 데 그렇게까지 되니까, 내가 시집을 잘못 와서 이런 일이 생기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어요. ‘내 때문에 그런 것 같다’ 하니까 우리 아저씨가 ‘무슨 소리 하노, 내 업이라서 그렇다’ 했어요. 남편이 시누이 보증을 서서 몇 십 억 부채를 지기도 했어요. 집에 빨간 딱지가 붙고요. 월급도 압류 당하고, 내가 모아놓은 돈도 다 털어 넣고, 무슨 일이 안되려고 하니까, 20년을 내리 박기만 해요. 

남편은 정말 점잖은 사람이었어요. 이웃 사람들이 ‘느그 신랑 같이 점잖은 사람이 없다, 발자국 소리도 점잖다’라고 할 정도로. 근데 너무 힘드니까 남편이 술을 마시기 시작했어요. 한 달에 500만원씩 벌어 와도 그게 거의 다 압류가 되는데 얼마나 힘 들었겠어요. 알콜 중독이 되니까 난폭해지기도 했어요. 올해 4월에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시기 전까지 4~5년은 참 애를 먹였어요. 알콜중독으로 간경화가 와서 병원에 입원시키기도 했어요. 그래도 남편이 애들한테는 참 잘했어요. 두 딸이 착하게 크니까 그거 보고 살았지요. 적은 생활비였지만 애들 공부 다 시키고, 시집 다 보냈어요.       





Q . 남편이 돌아가시고 나서 어떠셨나요?    


A . 너무 힘들 때는 차라리 빨리 가셨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거든요. 그런데 막상 돌아가시고 나니까 못해준 것만 너무너무 생각나고, 못 견디겠어요. 내가 그런 생각을 왜 했나 싶고요. 한참 힘들게 할 때는 폭력적으로 변하기도 하고 나한테 욕도 하고 그러셨는데, 지금은 살아만 있으면 좋겠어요. 술을 먹어도 뭘 해도 좋으니까 살아만 있으면 좋겠어요.     



Q . 시집오시기 전에는 어떻게 지내셨어요?    


A . 아버지는 군인이셨고, 집에서는 횟집이랑 슈퍼 같은 가게를 크게 했어요. 우리 친정어머니가 여고를 나오셨으니까, 자식 많이 낳으면 공부 못시킨다고 아이를 많이 낳지 않으셨어요. 산아제한이 있기도 했고요. 부모님이랑 딸 하나 아들하나가 내 형제의 다예요.      



Q . 딸 둘을 두셨지요?    


A . 스물여섯에 첫 딸 낳고, 서른 살에 둘째 딸을 낳았어요. 다른 집은 아들 못 낳는다고 구박도 하고 하던데, 우리 시어머니가 ‘못 낳는 거를 우짜겠노, 마 됐다’ 하셨어요. 둘 낳고 나서 자연유산이 일곱 번이나 됐거든요. 시어머니가 아들 아들 안하셔서 힘들지 않았어요. 우리 아저씨도 그랬고요. 딸만 둘 있어도 좋기만 좋아요.     





Q . 계속 전업주부로 사셨나요?    


A . 네, 계속 살림만 하고 살았어요. 내 주변 사람들이 다 전업주부라서 직장 나갈 생각을 안했어요. 사십 넘고 나서는 그 사람들도 보험회사 다니고 했는데, 우리 아저씨가 일하는 걸 반대했어요. 일은 하고 싶었어요. 처녀 때는 시장님 비서 일도 하고, 전화국 일도 했거든요. 가게라도 하나 하고 싶었는데, 남편이 썩 원하지 않았어요. 많이 보수적이었지요. 큰 딸이 시집가고 나서는 큰 딸 손주들 봐주고, 둘째 시집가고 나서는 그 손주 봐주고요. 둘째가 젖몸살을 앓다가 면역력이 떨어져서 척수염이 왔어요. 애를 안지도 못 할 만큼 아파서 내가 늘 가서 살림을 도와줘요.     



Q . 엄마로 산다는 건 어떤 거였나요?     


A . 우리 애들, 참 사랑을 많이 주고 키웠어요. 내가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으니까요. 살다가 어려움이 왔어도 친정에서 도움을 많이 받을 정도였어요. 남편이 한번 일하러 가면 한 달에 한번씩 밖에 집에 못 와요. 그 동안에 시어머니 모시고, 애들 키우고 하면서 집을 돌봤어요. 시어머니는 아직도 계세요. 어질고 부지런한 분이라서 살림을 아직도 척척 해내세요.     





Q . 어머니 평생에 가장 값진 것 하나 남기신다면, 무엇인 것 같으세요?    


A . 자식 잘 키우고, 떳떳하게 산거요. 자식들이 남한테 욕 안 듣고 살만큼 잘 키운 거, 그거 참 잘했다고 생각해요. 그거 하나만큼은.         








‘스타벅스’에서 만나자고 하자, 어머니는 사회 활동가인 딸의 지인은 으레 다 가난한줄 아시고 ‘맥도날드’에서 만나자고 했다. 다행히 스타벅스에서 따뜻한 라떼 한잔을 대접 할 수 있었고, 그녀는 지난 삶을 조근조근 풀어주었다. 나의 어머니가 어떤 삶을 사셨던가, 돌이키며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던 나는, 알콜 중독의 남편을 간호한 일마저 그리움으로 남기려는 그 애착이 너무나 따뜻해 깜박 온기에 잠길 뻔 했다. 신은 자신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엄마를 보내셨다, 는 말이 1950년대에 태어난 여성들에겐 낯선 의미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위로는 부모를 모시고, 아래로는 자식이 낳은 손자 손녀들까지 키우며 딸 아들의 사회활동을 지지하는 그녀들의 삶은 현대사 어디쯤에 기록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은 엄마를 창조했다. 역사의 기록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인간을 돌보기 위해서 말이다.    





 [김유리의 지구인 프로젝트]


「김유리의 지구인 프로젝트」는 
 부산문화재단의 문화다양성 확산을 위한 무지개다리 사업 일환으로 추진됩니다. 
 우리가 속칭 ‘소수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어쩌면, 인종이나 민족, 장애, 성별, 외모, 학력, 가족 구성, 지역, 사회적 신분 등 
 사회가 정한 틀에 의해 소수자로 분류된 건 아닐까요. 
 김유리의 지구인 프로젝트는 우리 모두 다 소수자라고 생각 합니다. 
 그래서 ‘부산에 살고 있으면서 사회적 편견을 경험한 40인의 지구인 에피소드’를 기록해 
 그동안 깨닫지 못했거나 무관심 했던 우리 안의 배타성에 대해 함께 이야기 해보려 합니다. 
 부디 40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면서 마음에 작은 파도가 일렁이기를 소망해 봅니다.  

                                                                      _ 부산문화재단 × 김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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