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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리 Dec 11. 2016

490일의 항암 치료

김유리가 만난 지구인 23_유방암 환자 임정숙





그녀의 친정어머니는 위암이었다. 그녀도 위암을 앓을 줄 알았다. 육십이 넘은 나이에 안온히 늙어가도 한 많은 세월을, 그녀는 유방암과 싸워야 했다. 가장 가까이 있어야 할 남편 마저 평생을 뒷바라지 한 아내의 손을 잡아주지 않았다. 사업을 접고 나서 생활비 한 푼 벌어다주지 않는 남편을 대신해 도배 일을 하러 다녔던 그녀는, 고생한 세월을 믿을 수 없으리만큼 곱고 예쁜 얼굴이었다. 다만 두 손만은 마다가 굵고 거칠었다. 평생 일을 해온 손이었다. 50년 전에는 충청도 어느 과수원 부농 집의 예쁜 소녀였고, 그 이후엔 결혼 하면서부터 어딘가 어긋나 버렸다는 한 여자였다. 그리고 그녀의 삶을 덮쳐온 병마 역시 아이들을 젖먹인 가슴에서부터였다.           






Q . 치료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나요?    


A . 10월 30일에 항암치료가 끝났어요. 암의 경중에 따라 투여 횟수도 다르고 양도 다른데, 1번, 2번을 한 세트, 1차라고 하는데, 그걸 3주에 한번 맞아요. 6차까지 했어요. 제일 쉽게 잘 낫는 병도 유방암이고, 제일 재발이 잘되는 병도 유방암이래요. 우리 친정 엄마가 위암으로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나도 위암만 걸릴 줄 알았지 유방암은 생각도 안했어요.     



Q . 충청도가 고향이시죠?     


A . 결혼하면서 부산에 왔어요. 큰 애가 33살이니까 33년 살았네요. 충청도에서 태어나서, 서울에서 직장생활 하다가 남편을 만났어요. 큰애 한 살 때 부산 와서 시부모님이랑 시누이 둘, 시동생 하나랑 같이 큰살림을 시작했어요. 시댁이 온천장에서 2천 평이나 되는 모텔을 했어요. 모텔에서 일하는 아줌마들 삼시세끼하고, 하면서 남들보다 좀 모진 시집살이를 했어요. 그게 스트레스가 너무 받아서 암에 걸린 것 같기도 해요.    





Q . 시집살이가 어떠셨나요?    


A . 신랑 어머니가 신랑 돌 지나고 돌아가셨어요. 시어머니는 계모였어요. 우리 남편이랑 정이 참 없는 사이였어요. 시집오니까 시어머니 나이가 마흔 두 살 밖에 안돼요. 젊으셨으니까 며느리 얻은 걸 부끄러워하셨어요. 당신이 낳은 자식들하고 차별도 심했고요. 둘이 겸상도 안할 정도였어요. 친정에서는 그런 차별을 모르고 살다가, 남편이 당하는 차별, 내가 겪는 차별을 보면 서러웠어요. 얼마나 고생스러웠는지 친정 갈 때는 빨리 가려고 비행기 타고 가고, 올 때는 제일 느린 완행열차 타고 왔어요. 그렇게 천천히 오는데도 시댁 온다는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났어요. 우리 애들은 정말, 이런 집 말고 좋은 집에 결혼 시키고 싶어요.     



Q . 차별이 어땠나요?     


A . 지금도 명절에 시댁 가면 당신 자식들 집엔 좋은 과일 좋은 음식 싸줘도, 우리 집에 주는 건  시든 과일, 유통기한 지난 우유, 그런 것만 싸줘요. 지금도 그러니 옛날엔 어땠겠어요. 밥 때가 되면 시어머니가 쌀을 식구들 먹을 만큼만 내주시는데, 내 밥은 없어요. 나는 남은 것만 먹었죠. 작은 며느리가 들어오면서야 분가를 시켜줘서 겨우 나왔어요. 배짝 말라서 얼굴에 시커멓게 기미가 껴서. 서른네 살 때였어요.     





Q . 암은 언제 발병하셨어요?    


A . 신랑 사업 잘 안되고, 나도 일하러 나가고, 그러면서 내가 너무 지쳤던 것 같아요. 지금도 남들에게 그래요. ‘내 체력이 밑바닥까지 가지 말게 하라’고요. 그렇게 되니까 암이 오더라구요. 진단 받기 2년 전부터 몸이 안 좋았어요. 늘 피곤하고, 지치고, 우울하고, 몸도 너무 찼어요. 밤에 잘 때 울 정도로 어깨가 아프고요. 송곳으로 찌르는 것처럼 아파요. 한의원에서 그러는데 유방암 오기 전에 어깨가 아프대요. 그래도 몰랐어요. 늘 자도 늘 힘들어요. 

 암 진단 받기 두 달 전인가, 어느 날 집에 누워 있는데 그런 생각이 들어요. ‘돈 줄 거 다 정리하고, 내 죽고 나면 내 저 옷들 치우기도 힘들텐데 옷도 치워야겠다’ 암이란 걸 몰랐는데도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어요. 그 길로 일어나서 대출 받은 거 다 정리하고 집도 작은 데로 옮기고, 옷도 필요한 것만 남기고 다 정리하고, 두 달 있다가 건강검진을 받았어요. 둘째가 간호사예요. 둘째한테 전화를 해서 ‘위가 늘 아픈데 검사를 좀 받아야겠다. 내시경만 하게 예약 좀 해줘라’하니까 딸이 건강검진을 권해요. 그랬는데 위는 괜찮고, 오른쪽이 유방암인거예요. 2015년 7월에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아무 이상 없었거든요. 근데 4개월 만에 암조직이 자란 거예요.     


Q . 유방암이란 말을 들으셨을 때 어떠셨어요?


A . 이상하게 떨리는 것도 없고, 담담했어요. 의사가 말을 못하고 있어서, ‘왜요, 암이에요?’했더니 의사가 ‘이렇게 담담하게 암이냐고 묻는 환자는 처음이다’ 그래요. 주변 사람들은 울고 막 그러는데, 그냥 받아들였어요. 수술 하라니까 수술 했고요. 수술하는 게 힘든 게 아니라 항암이 힘들었어요.    





Q . 항암치료가 많이 힘들다고 들었어요.     


A . 항암제를 맞으면, 괜찮은 사람은 괜찮은데 예민하고 비위 약한 사람은 심하다고 그래요. 내가 그런 사람이었고요. 머리 아프고 메스껍고 어지럽고, 냄새도 못 맡으니까 아무것도 못 먹어요. 항암치료 때는 잘 먹어야 하는데 도저히 먹을 수가 없어요. 병원 입구에만 들어서도 항암제, 그 냄새가 나요. 항암은 유익균이나 유해균이나 다 죽이는 치료니까, 백혈구 수치가 떨어져요. 못 먹으니까 더 떨어지고. 2000미만이면 항암치료도 못 받아요. 그럼 또 백혈구 수치 올리는 주사를 맞고 또 항암 하고. 어찌나 힘든지 옥상에서 뛰어내리고 싶었어요. 그걸 490일 동안 했어요. 1년 넘게. 머리카락이 3/2가 빠졌어요.         



Q . 항암치료 받으시는 동안 남편이 도움이 되셨어요? 



A . 남편은 사랑을 못 받고 자라서인지, 정을 줄줄 몰라요. 남편은 내가 필요할 땐 없었어요. 항암치료 받으러 다니는 동안  그것 때문에 상처를 너무 많이 받았어요. 차라리 남편이 없었다면, 기대할 곳이 없었다면 상처도 안 받잖아요. 하지만 남편은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기만 했고, 나를 암만큼 힘든 고통에 시달리게 했어요. 젊었을 때야 깡으로 버텼지만, 나이 먹으니까 버틸 힘도 없어요. 항암 치료는 끝났지만, 나는 남편의 노예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내가 원하는 걸 못하고 살았어요. 얼마 전에야 ‘이렇게 계속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만 살았으면 좋겠다’라는 말을 겨우 했어요. 내가 힘들 때 손이라도 잡아줘야 하는 게 부부 잖아요. 자꾸 손을 안 잡아주면 ........ 나도 사람이니까요.         






그녀의 고통은 현재진행형이었다. 속 깊은 이야기를 쏟아내며 한 번도 눈물을 보이지 않는 그녀는, 이미 오래전에 눈물이 말라버린 사람 같았다. 임파선을 도려내는 수술을 받고 죽을 만큼 힘들었던 항암치료를 받고, 생활비를 버느라 뛰어다니고, 두 아이를 씻기고 먹이고 입히는 동안, 그녀의 가슴만 오직 눈물을 기억했다. 그리고 병이 되었다. 재발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야 물론 있겠지만, 그녀는 고통 속에서도 아직 의연하다. 가슴의 주인이기 때문일까, 어머니이기 때문일까, 여성이기 때문일까, 인간이기 때문일까. 그래서 그녀의 고통은 존엄하다. 490일의 통증 뒤에 찾아온 새 삶이 가져다 준 신산함을 여즉 견뎌내고 있기 때문이다.  



[김유리의 지구인 프로젝트]


「김유리의 지구인 프로젝트」는 
 부산문화재단의 문화다양성 확산을 위한 무지개다리 사업 일환으로 추진됩니다. 
 우리가 속칭 ‘소수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어쩌면, 인종이나 민족, 장애, 성별, 외모, 학력, 가족 구성, 지역, 사회적 신분 등 
 사회가 정한 틀에 의해 소수자로 분류된 건 아닐까요. 
 김유리의 지구인 프로젝트는 우리 모두 다 소수자라고 생각 합니다. 
 그래서 ‘부산에 살고 있으면서 사회적 편견을 경험한 40인의 지구인 에피소드’를 기록해 
 그동안 깨닫지 못했거나 무관심 했던 우리 안의 배타성에 대해 함께 이야기 해보려 합니다. 
 부디 40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면서 마음에 작은 파도가 일렁이기를 소망해 봅니다.  

                                                                      _ 부산문화재단 × 김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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