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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리 Dec 20. 2016

김유리는 지구인이다

김유리가 만난 지구인 40(최종) _ 작가 김유리



마지막 인터뷰를 ‘나’로 하고 싶다고 말했을 때, 부산문화재단의 고윤점 팀장은 으레 그랬듯 웃음을 터뜨렸다. 왜요? 왜 작가님 스스로를 인터뷰 하고 싶어요? 물론 그렇게 물을 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준비한 대답도 있었다. 

나는 소수자의 종합선물세트예요. 프리랜서고, 이혼했고, 아이가 없고, 이혼 가정에서 자랐고, 두 쌍의 부모님을 가지고 있죠. 그 외에도 덧붙일 것은 많았다. 대학을 중퇴했고, 글을 쓰고, 애인과 함께 살고 있지만 결혼을 원하지 않고, 미드 오타쿠 이고 ...... 내 설명이 채 끝나기도 전에 팀장은 백기를 흔들었다. 소수자에 해당되네요. 하세요. 하죠. 그래서 ‘김유리가 만난 지구인’의 마지막은 ‘김유리’이다. 동시에, 40명을 만나 인터뷰한 후기이기도 하다.             







Q .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A . 작가고, 이름은 김유리예요. 올해 마흔 됐고요. 나이를 인정하기 싫어서 오히려 ‘올해 마흔 됐다’고 많이 말하고 다녀요. 받아들이려고 노력 중이예요. 소설 <옥탑방 고양이>로 2001년에 데뷔했고요, 그 뒤엔 별다른 대표작이 없어요. 신문에 칼럼을 쓰거나, 잡지에 기고하고, 스토리텔링 관련 작업도 많이 하고, 시나리오 작업도 하고, 글쓰기 강좌도 하는 식으로 여러 가지를 동시에 하고 살았어요. 부산 여기저기를 옮겨 다니면서 살았는데, 지금은 용호동 이기대 입구에 있는 주택에서 강아지 네 마리랑, 고양이 두 마리랑 같이 살고 있어요.     



Q . 왜 자신을 소수자라고 생각하나요?    


A . 언제나 내 삶은 ‘다수’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어요. 그렇게 살려고 해서 살았던 건 아닌데, 어쩌다 보면 어떤 집단의 언저리에 항상 어정쩡하게 발을 걸쳐 있었어요.     





Q . 처음 시작은 어떤 것이었나요?    


A . 다섯 살 무렵부터 부모님이 별거에 들어가시고, 평일엔 아버지 집, 주말엔 어머니 집으로 옮기면서 살았어요. 문현동 로터리에 있는 횡단보도 한쪽에서 어머니가 내 손을 놓으면 혼자 달려가서 건너편에 있는 아버지 손을 잡았죠. 일곱 살 때 두 분이 이혼하시면서 아버지 가족들이랑 계속 살았어요. ‘엄마가 없다’는 사실이 계속 의식되면서도 가족들 중 누구한테 물어 볼 수가 없었어요. 어떤 대답을 듣더라도 좋은 대답이 아닐 것 같아서요. 이혼하신 직후에 어머니가 호주로 이민 가셨다는 것도 다 커서야 알았어요. 세상 모든 가족이 다 우리 가족 같은 줄 알았죠. 그렇지 않다는 걸 초등학교 들어가고 나서야 알았어요.     





Q . 집단에서 소외감을 많이 느꼈나요?    


A . 네, 아버지가 재혼했다는 사실을 무척 엄격한 비밀로 지켜야 하는 사회 분위기가 있었어요. 옛날이니까 그렇기도 했지만, 첫 번째 결혼한 사람과 계속 살고 아이들을 가져야 한다는 우리 사회의 강박 같은 게 있잖아요. 사실 나의 정체성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떨어져 산다는 것에서부터 기인하는데, 그걸 솔직히 누구에게도 이야기 할 수 없으니까 이 간단한 사실이 비극으로 점점 변해갔어요. 아홉 살 때 아버지가 재혼하시고, 새어머니는 저한테 무척 잘해주셨거든요. 당신이 낳은 자식보다 더요. 항상 내가 우선이었고 동생보다 저부터 돌봐줬어요. 가족들은 다시 행복해졌는데, 나만 비극의 주인공인거죠. 철없을 땐 우리 가족을 정상적으로 보이기 위해 내가 희생한다는 생각까지 들었어요.     



Q . 그 이후의 삶은 어땠나요?    


A . 고등학교 때 까지는 평범한 ‘교회 언니’로 살았어요. 보수적인 기독교 가정이었거든요. 피아노 치고, 여중 여고 나오고, 책 좋아하고, 그냥 그런 애로 살았어요. 그러다 대학에 가면서 응어리진 것들이 폭발하기 시작했어요. 보라색으로 염색을 하기도 하고, 코 피어싱도 하고, 집에도 잘 안 들어가고, 술은 못 마시면서 술자리엔 언제나 끼어 있고, 시끄럽게 노는 거 좋아하고. 부모님은 내가 너무 변했다고 걱정하셨는데, 난 그제야 내 모습을 찾은 것 같았어요. 교회에서 점점 멀어지면서 가정 안에서는 ‘엇나간 애’가 되기도 했지만요. 친구들도, 친척들도 거의 독실한 신자들이 많으니까 내가 좀 잘못된 게 아닌가 하는 죄책감을 많이 느꼈어요. 그래도 어떡해요. 대학 친구들이랑 어울리는 게 재미있고, 교회는 가기 싫은 걸요. 11시가 귀가 시간이니까 11시까지 집에 들어왔다가, 아버지 주무시면 다시 나가서 새벽까지 놀다 오곤 했죠. 부모님한테 끌려서 교회 하면 첫 번째 기도 시간에 도망치고요. 앞문으로 나가면 들키니까 뒷문으로 담 넘어서 도망갔어요. 예배드리는 시간이 너무 지루했어요.    




Q . 작가가 된 후에는 달라지는 게 없었나요?    


A . 직업이 생기니까 좋긴 했죠. 아르바이트만 하다가 원고료를 받게 되니까. 근데 제가 로맨스 소설로 데뷔를 했잖아요. 아버지는 등단하기를 바라셨는데 그렇게 데뷔를 하니까 걱정을 많이 하셨죠. 문단에 있는 작가들이랑 어울리지 못하는 게 열등감이 되기도 했어요. 지금은 장르 소설 작가가 많아서 그런 분위기가 많이 없어졌죠. 등단을 해야 진짜 작가라는 대우를 받을 때 였으니까요. 그러니까 등단에 대해서 혼자 환상을 가졌다가, 다시 ‘에이, 필요 없어’라고 했다가, 왔다갔다 해요. 지금도 그래요. 열등감이 있어요. 있는 건 어쩔 수가 없어요. 인정해야죠.     



Q . 결혼생활은 어땠나요?    


A . 좋았어요. 지금은 전남편이 되었지만, 그 사람이랑 죽이 잘 맞는 친구였어요. 얘기하는 것도 재미있고 어디 놀러 가는 것도 재미있었어요. 같이 고양이 세 마리를 키웠는데, 그 중의 한 마리가 <옥탑방 고양이>라는 소설 제목을 짓는데 많은 영향을 끼치기도 했고요. 10년차에 들어서면서 뭔가 달라지고 있다는 예감을 느꼈어요. 무슨 일이 구체적으로 일어난 건 아닌데, 우리가 영원하지 못하겠구나, 하는 불안감이 들었어요. 더 이상 우리는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 걸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에 직면하게 되는 거요. 함께 있어서 장점도 있었지만 단점이 점점 더 커진 거죠. 그런데 이혼하기 싫었어요.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사이라는 걸 인정도 하기 싫었고, ‘이혼한 여자’가 되는 게 너무 무서웠어요. 이제껏은 그냥 조금 개성 있는 삶을 살았다, 정도지만 이혼하게 되면 완전히 소수자가 될 것 같은 거예요. 그게 무서워서 5년을 더 질질 끈 것 같아요. 나중엔 서로 더 안 좋은 모습만 보고 헤어졌죠. 그래도 유쾌하게 헤어졌어요. 둘 다 미드 좋아했으니까, 새로 나온 미드에 대해 같이 수다 떨면서 법원 가고, 우리 순서 기다리면서 메로나 먹고, 법원 나온 다음엔 각자 ‘안녕’하고 갈길 갔어요. ‘잘 살아라’ 이런 말도 했던 것 같아요.        



Q . 이혼 이후엔 어떻게 살았어요?    


A . 이상하게 주변 사람들이 별 걱정을 안 해주더라구요. 나보다 주변 사람들이 더 심각하면 어떡하지, 했는데, 부모님도 그렇고 ‘우리 이제 같이 안 살아’라는 말 다음에 뭘 더 묻지 않으셨어요. 친구들도 그래, 잘했어, 그러구 별 말을 안했어요. 뭐라고 더 말 하면 제가 화 낼까봐 그런 것 같기도 한데, 나를 배려해서 그래줬던 것 같아요. 그게 참 고마워요. 

 이혼 한 다음에 이상하게 일이 잘 풀렸어요. 일거리도 많이 들어오고 글도 더 많이 썼고요. 공동의 삶 보단 개인적인 삶에 대해 비로소 중요하게 생각하게 된 것 같아서 인 것 같아요. 애인도 생겼는데, 지금 함께 살고 있지만 결혼은 하고 싶지 않아요. 되도록 오래 같이 살곤 싶은데 다시 결혼이라는 제도 속으로 들어가는 게 꺼려져요.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냥 함께 있으면 그걸로 됐고, 결혼 까지는, 나한테는, 쟁취욕에 불과한 것 같고요.      



Q . 모르는 사람들이 생활에 대해 묻지 않아요?    


A . 많이 물어보죠. 만나는 사람 있냐, 결혼 할꺼냐, 아이는 언제 가지냐. 만나는 사람 있고 결혼 안할 거라고 하면 그래도 아이는 가져야지, 라고 많이 말씀하시더라구요. 아직은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고 하면, 지금 낳아도 노산이라면서(웃음) 당장 가지래요. 그래도 아이를 가지는 건 더 자연스러웠으면 좋겠어요. 

 동네 사람들도 많이 물어봐요. 같이 사는 남자는 누구냐, 아가씨냐, 아줌마냐, 왜 그렇게 동물을 많이 키우냐, 그런 거요. 일일이 솔직하게 대답할 수가 없어요. 아가씨도 아줌마도 아니에요, 연하의 애인이에요. 유기동물을 데려오다 보니까 여섯 마리나 됐어요. 그런 거. 친한 사이도 아니고 안 친한 사이도 아닌데 일일이 얘기하면 내가 너무 실없는 사람처럼 느껴져서요. 그래서 ‘사회적인 거짓말’을 배웠어요. 그냥 남동생이라고 하고, 아가씨라고 하고, 개 고양이가 좋아서 많이 키운다고 하고요. 거짓말을 한다는 죄책감보단 ‘에라 모르겠다’라는 마음이 더 커요. ‘나는 왜 다른가’라는 문제에 대해 계속 시달리다 보니 그냥 편하게 살고 싶어요.     



Q . 앞으로의 계획은 어때요?    


A . 일단 ‘김유리의 지구인 프로젝트’를 마무리 하고 나면, ‘부산 여자’에 대한 인터뷰를 하고 싶어요. 어떤 공통적인 물건을 매개로 한 릴레이 인터뷰도 하고 싶고요. 브런치나 페이스북에 계속 연재할 생각이예요. 원고가 완성되면 출판사들에게 출판할 수 있는지 물어볼 생각이고요. 시나리오와 영화에 대한 애착이 커서 시나리오는 6개월에 한편 쓰는 게 목표이기도 해요. 장기적인 계획은 노후 대비 하는 거, 그거 말고는 없는 것 같아요. 내가 좋은 사람이 되는 거, 조금 더 깨어 있는 사람이 되는 거, 그런 거는 당연한 목표인 것 같고요. 단기적인 목표는 내년엔 올전세로 이사 가는 거예요. 월세는 이제 그만. 근데 실은, 지금처럼만 계속 살면 좋겠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예요. 그냥 지금처럼만. 지금 딱 괜찮거든요.                     






‘김유리가 만난 지구인’ 프로젝트는 4개월간 총 40명의 사람들을 만났다. 우리 모두는 지구인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이 좁은 땅덩어리에서 소수자인 우리는 같은 공통점을 가졌다. 이 땅을 벗어나면, 어딘가에선 다수가 된다는 것이다. 이런 지구인에게 다수와 소수를 따지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으랴. 때로는 함께 울고, 때로는 함께 웃으며 진행한 인터뷰에서 나는 참으로 귀한 것을 얻었다. 세상의 모든 ‘산 것’은 존중받을 권리가 있으며, 어떤 선택을 했든 대가를 치르고 남은 삶을 행복하게 보낼 권리가 있다는 것. 실은 이것만 지켜져도 지구상에서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후에도 나는 또 다른 인터뷰를 하기 위해 지구를 방랑할 것이다. 이 사람에게서 저 사람에게도, 어쩌면 이 도시에서 저 도시에게로, 또 어쩌면 이 나라에서 저 나라에게로. 나는 더 많은 질문과 더 많은 삶을 기대하고 있다. 가슴이 뛴다. 우리 모두는 지구인이다.       




[김유리의 지구인 프로젝트]


「김유리의 지구인 프로젝트」는 
 부산문화재단의 문화다양성 확산을 위한 무지개다리 사업 일환으로 추진됩니다. 
 우리가 속칭 ‘소수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어쩌면, 인종이나 민족, 장애, 성별, 외모, 학력, 가족 구성, 지역, 사회적 신분 등 
 사회가 정한 틀에 의해 소수자로 분류된 건 아닐까요. 
 김유리의 지구인 프로젝트는 우리 모두 다 소수자라고 생각 합니다. 
 그래서 ‘부산에 살고 있으면서 사회적 편견을 경험한 40인의 지구인 에피소드’를 기록해 
 그동안 깨닫지 못했거나 무관심 했던 우리 안의 배타성에 대해 함께 이야기 해보려 합니다. 
 부디 40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면서 마음에 작은 파도가 일렁이기를 소망해 봅니다.  

                                                                      _ 부산문화재단 × 김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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