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리가 만난 지구인 10 _ 고리원자력발전소 엔지니어 권순각
그는 착한 학생이었다. 순하고 맑은 눈망울을 가지고, 제도에 거역하는 일 없이 살아왔다. 가족 내의 상황도 그랬고, 자신의 포지션이 그랬다. 강원도에서 태어나 경북 봉하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중3때 부산으로와 대학 졸업 후 국내 대기업 취업에 성공하고 원자력 발전소에까지 입사하는 동안 그는 기대주였다. 친구들은 그에게 ‘촌놈이 출세했다’라고 했다. 그리고 기대는 점점 자신을 짓눌러 왔다. 30대 후반에서야 돌아본 삶에서 그의 무엇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을까.
Q . 자신을 소개해 주세요.
A . 고리원자력발전소에서 엔지니어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사오년 전부터 여가시간엔 커피 공부하고요. 후쿠오카에 여행 갔다가 핸드드립으로 마신 브랜드 커피를 잊지 못하는 사람? (웃음) 예멘 모카였죠. 책도 읽고 글 쓰는 것도 좋아해요. 와이프랑 딩크족으로 살고 있습니다. 올해 마흔 셋이고요.
Q . 전공이 기계 공학이었네요?
A . 네, 기계 공학 전공하고, 첫 직장은 삼성전자에서 핸드폰 제조 관련 업무를 했어요. 그러다 이직을 했고, 원자력 발전소에서 근무하게 됐어요. 이 직업을 가지게 되리라고 전혀 생각을 못했어요.
Q . 원전 괜찮냐고 사람들이 자꾸 물어보지 않아요?
A .많이 물어봐요. 근데 제가 담당하던 일이 아니면 그 일에 대해서는 자세한 대답을 할 수 없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잘 이해 못해요. 실제로 발전소에서는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각각의 부서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지진에 관련된 일도 마찬가지 예요. 전 단층 같은 부분은 모르거든요. 그건 제가 대답할 수 없는데 사람들은 가끔 제가 그걸 다 아는 줄 알아요. 저는 발전소에 다니는 직원일 뿐이거든요. 다 알 수는 없죠.
Q . 일이 삶에 미치는 영향은요?
A . 처음엔 안 그랬는데, 여러 가지 일로 비중이 커졌어요. 처음엔 공기업에 들어온 것만으로도 기뻤어요. 원자력 발전소는 정부재투자회사인데, 주식을 공기업인 한전이 다 가지고 있으니까 일종의 공기업에 포함돼요. 가족들도 좋아하고요. 명절에 편했어요. 취직 잘했다고 다들 그러시니까요. 그런데 몇 년 지나고 나자, 내가 이 특별한 조직 사회에 적응 하는데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일 하는 데는 지장이 없는데, 내 스스로가 슬픈 거죠. 그 슬픔을 인지 못하고 살았어요. 어느 날 문득, 누군가가 물었어요. 순각 씨는 가장 듣고 싶은 말이 뭐냐고. 그 순간 눈물이 나려고 했어요. 그런 순간이 처음 이었어요. 대답을 못하고, 잠시만요, 화장실 좀, 하고서는, 화장실에 가서 혼자 몰래 울었어요.
Q . 듣고 싶은 말이 뭐였어요?
A . 그동안 고생했어, 힘들었지. 라는 말. 그 말이 제일 듣고 싶었어요. 그 말을 듣고 싶어 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놀랐어요. 와이프도 있고 직장 동료도 있지만, 나를 100% 이해해주는 사람이 주변에 없다는 사실이 절 힘들게 했던 것 같아요. 나에게 많이 공감해주는 사람이 필요했어요.
Q . 순각씨가 느낀 사회생활은 어땠어요?
A .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실망감이 느껴지면 힘들었어요. 사람과 사람 사이엔 공감하는 부분이 있어서 거기에 따라 결속력이 유지된다고 믿거든요. 만약 A라는 사람이 B라는 사람을 위해서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했는데, B가 그걸 무시하면 실망하게 되잖아요. 어렸을 때는 그런 일에 회복이 빨랐는데, 나이 들수록 회복하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힘들어져요. 회사에서 그런 일이 많이 생겼죠. 좋은 직장이 있고, 고정적인 월급을 받는다고 사람이 다 괜찮은 건 아니거든요. 항상 웃고 다녀도 내가 받은 상처들은 그대로 안고 가야 해요. 그걸 부정 할 수 없어요.
거기다 발전소 다니면 놀고먹지 않느냐, 업체 갈구는 일 밖에 안하지 않냐, 그런 말 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친구들도 그렇고 친척들도요. 전혀 그렇지 않거든요. 근데 회사생활 빡세다고 어디다 줄줄이 얘기 할 순 없잖아요. 나는 취업 잘 한 사람이니까.
Q . 내 삶은 어떤 것 같아요?
A . 스물아홉에 결혼을 했어요. 서른다섯 이전의 삶을 생각하면 텅 빈 공백 같아요. 그냥 열심히 했거든요. 공부를 해야 돼, 하니까 공부를 했고, 결혼을 해야 돼, 하니까 결혼을 했어요. 하루하루 그냥 살았던 것 같아요. ‘억지로’ 착한 학생이었어요. 원했던 게 아니라. 살기 위해서 착한 학생 이어야 했어요. 집안 사정이 넉넉한 것도 아니었고, 부모님이 뒷바라지를 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형도 농아였어요. 친척들이 저한테 기대를 엄청 했어요. 네가 장남 역할을 해야지, 하는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 속으로는 정말 싫은데, 표시를 전혀 낼 수 없었어요. 공부해서 시험 성적 잘 받으면 부모님이 좋아하시니까 계속 했어요.그러니까 착해질 수밖에 없었어요. 나는 이런 상황에 놓였고, 공부를 해야 벗어날 수 있고, 사람들이 그걸 다 원하니까. 나는 착한 학생 이니까. 하지만 속으로는 ‘하기 싫은데 왜 해야 되는 거야, 왜 주변 사람들은 나한테 자꾸 이런 압박을 주는 거야’하는 마음이 있을 수밖에 없어요.
Q . 스스로에게 하는, 아주 당연한 질문이 삼십대 후반에 시작된 건가요?
A . 남들만큼 하니까 그냥 그 만큼만 하고 살다가, 삼십대 후반부터 알맹이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거기서부터는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싶은 욕구가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 거죠. 또 다른 나, 걔의 욕구를 만족시켜 주는 삶도 필요하구나, 라는 걸 깨달았어요. 그때부터 커피를 공부하고, 글도 썼어요.
오래 전이지만, 수도원으로 피정을 간 적이 있었어요. 거기 가면 휴대폰도 안 되고 텔레비전도 없어요. 인위적으로 저를 작은 동굴에 넣어놓은 느낌. 그게 편안했어요. 그 불편함이 나쁘지 않았어요. 그 전까지 나는 불편함을 느끼면 안 되는 삶을 살았던거죠. 이제는 내 감정을 인지하고 싶어요.
지진 나면 어떻게 해야 되죠? 라는 질문에 그는 대답 대신 웃었다. 나 역시 그를 무슨 원전 대변인쯤으로 여긴 것이다. 그는 회사원이고, 순응적인 삶에 소극적으로 저항하는 소시민일 뿐인데 말이다. 사람들이 원전을 불안하게 느끼는 것은 그의 탓이 아니며, 그가 감당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그 조직 안에선 또 얼마나 많은 사연과 희생되는 개인이 있을 것인가. 그는 그저 ‘지구인’이다.
[김유리의 지구인 프로젝트]
「김유리의 지구인 프로젝트」는
부산문화재단의 문화다양성 확산을 위한 무지개다리 사업 일환으로 추진됩니다.
우리가 속칭 ‘소수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어쩌면, 인종이나 민족, 장애, 성별, 외모, 학력, 가족 구성, 지역, 사회적 신분 등
사회가 정한 틀에 의해 소수자로 분류된 건 아닐까요.
김유리의 지구인 프로젝트는 우리 모두 다 소수자라고 생각 합니다.
그래서 ‘부산에 살고 있으면서 사회적 편견을 경험한 40인의 지구인 에피소드’를 기록해
그동안 깨닫지 못했거나 무관심 했던 우리 안의 배타성에 대해 함께 이야기 해보려 합니다.
부디 40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면서 마음에 작은 파도가 일렁이기를 소망해 봅니다.
_ 부산문화재단 × 김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