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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리 Mar 02. 2017

딸 때문에 살아요

김유리가 만난 지구인 11_독거노인 김순남


  



 1935년생, 나는 어르신의 출생 년도를 되뇌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새마을 운동과 가난, IMF와 변화하는 사회를 온 몸으로 다 겪은 1935년 생 여성의 삶은 어떠할지, 그 굴곡을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어르신이 홀로 사는 다대포의 작은 집은 골목의 맨 끝에 있었고, 나는 집을 찾지 못해 조금 헤맸다. 골목에서 골목으로 이어진 끝에 있는 집은 실타래처럼 엉킨 어르신의 삶을 오롯이 보여주는 듯 했다. 어르신은 아픈 무릎을 절며 꽃이 심어진 화분이 대문부터 현관까지 가득 찬 자신의 집으로 나를 안내했다. 게발 선인장에 붉은 꽃이 매달렸고, 나는 그 곁을 지나 그녀의 고통스러운 삶 속으로 들어갔다.  





        


Q . 올해 팔십 한 살 이신데, 일제 강점기를 경험하셨어요. 

   

A . 11살에 광복을 맞았어요. 김해군 녹산면 생곡리에 살았는데, 아버지가 일본인 지주 밑에서 농사를 지었어요. 해방 후에 오빠가 부산고등학교에 합격해서 부산으로 공부하러 왔는데, 얼마 안 있어 농사 그만두고 가족이 다 부산으로 왔어요.  


   

Q . 결혼은 언제 하셨어요?   

 

A . 스물두 살에 했어요. 뒷집에 오빠뻘인 총각이 있었는데, 그 집이 부산에서 제일 크게 우마차 장사를 했어요. 옛날엔 교통수단이 없으니까 소나 말이 끄는 마차가 짐을 실어 날랐거든요. 시아버지가 우마차단을 이끌었지요. 앞집 뒷집 살다가 연애결혼을 했어요. 삼촌이 우체국 다니셨는데, 좋은데 중신도 해주셨는데, 내가 그만 연애를 하는 바람에. 결혼 안했으면 좋았을 텐데. 좋은 것도 모르고, 촌에서 와서 천지도 모르고 그만 넘어갔지요.     




Q . 결혼 생활은 어떠셨어요? 

   

A . 2남 2녀를 뒀어요. 중간에 남자애 하나 잃고. 시아버지 때는 소가 끄는 수레로 운수업이 잘 됐는데, 남편이 물려받으면서 잘 안됐어요. 부산에 트럭이 다니기 시작했거든요. 그리고 하는 사업마다 다 망했고, 남편은 직장을 잡아도 결근하기 일쑤였어요. 


   

Q . 많이 힘드셨겠어요. 

   

A . 돈이 없으니 내가 일을 했지요. 손수건에 수를 놓아서 성당에 팔고, 삯바느질도 많이 하고, 공사장 다니면서 고무 다라이에 흙하고 벽돌하고 이고 나르는 일도 삼사년 했어요. 처음에 그 일 할 때는 머리가 어찌나 아픈지, 꼭 쪼개지는 것 같아요. 그래도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견디라, 견뎌야 된다, 하니까 참고 일 했어요. 나 아니면 애들 건사할 사람도 없고. 일당이 만 오천 원이었던가, 2만원이었던가. 나중엔 4만원씩 받았어요. 자궁암 걸리기 전까지 계속 했어요.  


 



Q . 무리한 일을 많이 하셔서 몸이 많이 아프시군요. 

  

A . 둘째 낳고 자궁에 혹이 생겨서 수술하고, 오십대에 자궁암 수술하고, 또 소장에 구멍이 나서 수술하고, 얼마 전에 무릎 수술하고. 몸이 안 아픈 데가 없어요. 고혈압도 있고. 

 성질 불 같은 남편하고 산다고도 고생 많이 해서 그런 것 같아요. 술 먹고 들어오면 폭력을 썼어요. 골목 저 멀리서 남편 고함 소리 들리면 비가 와도 눈이 와도 애들 다 데리고  집 밖에 나가 있어야 했어요. 비가 그렇게 오는데, 애들하고 우산 쓰고 이리 저리 서성 서성했어요. 집에 들어가면 난리를 부리니까. 집에 돈이 없어도 난리고, 내가 돈을 벌어오면 또 자격지심에 난리고. 생각도 하기 싫어.



Q . 혼자 사시는 걸 주변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A . 교회를 다니는데, 교회 사람들은 내가 독거노인이란 걸 잘 몰라요. 11년 전에 남편이 폐암으로 죽었어요. 원체 고생을 많이 시켜 놓으니까 돌아가실 때는 얌전하게 돌아가셨어요. 좋아도 안하고, 미워만 했었는데, 속이 시원할 줄 알았는데, 영 허전했어요. 한 번씩 납골당 가면 옛날 일이 생각이 나서 많이 울어요. 


    




Q . 가장 행복했을 때는 언제였어요? 

    

A . 혼자 살 때도 안 행복하고, 둘이 살 때도 안 행복하고, 사는데 별로 좋은 일이 없어요. 남편 죽고 아들 내외랑 같이 살 때는, 둘이 그렇게 싸우는 거예요. 나 때문에 싸우는 가 싶어서 그냥 집을 나왔어요. 아무 소리도 안하고. 언니 집에 가서 일주일 있으면서 전화도 안 받았어요. 첫딸이 몸이 많이 안 좋아요. 장애인 이예요. 시집보내 놓고도 내가 자주 가서 살림을 도왔으니까, 딸집 가까운데 집을 얻었어요. (눈물 보이심) 지금도 딸은 내가 있어야 돼요. 


     

Q . 할머니, 우셔도 괜찮아요. 

    

A . (울음) 아이고, 내가 죽고 나면 딸이 장애가 없어질까, 그런 생각도 해요. 내가 살아 있을 동안에는 어떻게 건사 안하겠나 싶기도 하고. 살아야겠다는 생각도, 안 살아야겠다는 생각도 없어요. 세월이 그냥 흘러가요. 그냥. 







   

어르신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었을까. 나 따위의 안온한 삶은 갖다 대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그 인생 이야기를 듣는 동안 내 역시 눈물이 차올랐지만, 살아있는 누군가의 삶에 눈물 흘린다는 것은 혹 실례가 아닐까 싶어 나는 눈물을 꾹 참았다. 어르신의 방엔 가족사진이 걸려 있다. 딸 둘, 아들 둘, 사위 둘, 며느리 둘, 친손자 다섯, 외손자 다섯. 어쩌면 다복한 삶이리라. 그러나 어르신이 그 다복함을 얻기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가 너무 컸다. 할머니, 다음에요, 제가 할머니 인생 이야기를 더 듣고 소설로 써도 될까요? 내가 할 수 있었던 말은 오직 그것 뿐. 어르신은 고개를 끄덕였고, 다시 만나자고 나와 약속했다. 빠른 시일 내에 나는 다대포 어느 골목 끝집을 다시 찾아 기나긴 삶의 여정을 들을 것이고, 이야기로 기록할 것이다. 그것이 내가 드릴 수 있는 최선의 헌화이리라. 




           

                              

 [김유리의 지구인 프로젝트]


「김유리의 지구인 프로젝트」는 
 부산문화재단의 문화다양성 확산을 위한 무지개다리 사업 일환으로 추진됩니다. 
 우리가 속칭 ‘소수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어쩌면, 인종이나 민족, 장애, 성별, 외모, 학력, 가족 구성, 지역, 사회적 신분 등 
 사회가 정한 틀에 의해 소수자로 분류된 건 아닐까요. 
 김유리의 지구인 프로젝트는 우리 모두 다 소수자라고 생각 합니다. 
 그래서 ‘부산에 살고 있으면서 사회적 편견을 경험한 40인의 지구인 에피소드’를 기록해 
 그동안 깨닫지 못했거나 무관심 했던 우리 안의 배타성에 대해 함께 이야기 해보려 합니다. 
 부디 40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면서 마음에 작은 파도가 일렁이기를 소망해 봅니다.  

                                                                 _ 부산문화재단 × 김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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