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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옆집언니 Jun 09. 2019

진흙탕 싸움은 정을 떼는 과정

밑바닥을 봐야 미련이 안 남는다

토요일 잠시 사무실에 출근해 급한 업무를 처리하고 친구 녀석과 한바탕 했다고 씩씩대는 아들 녀석의 억울함을 들어주며 같이 상대방 친구를 욕하기도 하고 또 아들놈의 잘못한 점도 살짝 지적해주면서 그리 보냈어요


일요일은 꿀맛 같은 늦잠을 자고 아들이 유튜브에서 본 토스트를 해주겠다며 앞치마를 두르시는 통에 앉아서 브런치를 즐기는 호사를 누렸습니다.


무언가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게으르면 죄짓는 것 같았던 그동안의 일요일과 달리 이혼한 후의 주말은 오래간만에 아들과 늘어지게 영화도 보고 밀어둔 청소를 같이 하면서 잔소리 폭탄을 날리기도 하고 느지막한 오후엔 아들과 같이 손잡고 커피랑 셰이크로 마시러 가는 진정한 힐링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행복이 별게 아니다 싶네요

아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놓치지 않게 옆에서 함께 할 수 있다는 건 세상에서 가장 큰 행복이지 싶습니다.


저희가 이혼 판결받으러 갔던 날 

같은 공간에 대략 100쌍이 넘는듯한 부부들이 이혼을 위해 모여있었어요

결혼한 지 얼마 안돼 보이는 앳된 신혼부부부터 백발이 성성한 노부부까지 각양각색의 사연으로 한 공간에 모였지만 원하는 바는 오로지 "이혼"이었겠죠?

말로만 듣던 '요즘 너도 나도 이혼인데 뭐가 그리 흠이겠냐?'라는 말이 살짝 실감이 나더라고요


이혼 판결까지 기다린 시간에 비해 판결 시간은 너무 순식간이더라고요

대략 3-4분 내외?

판결을 받고 나온 뒤 15년 결혼생활이 그 두어 가지 질문으로 종료가 된다는 게 어찌 보면 허탈하기까지 했죠


이혼 판결을 받자마자 둘이 같이 구청에 가서 이혼 신고를 했어요

도장을 찍고 서류상으로도 명백한 남남이 되어 구청을 빠져나오는데 저와 같은 날 이혼한 이혼동기로 보이는 부부가 문 앞에서 말다툼을 하고 있었어요


"TV는 나 준다고 했잖아? 왜 이제 와서 딴소리야?"

"야 TV는 아니지. 그건 내가 자취할 때부터 샀던 거니까 그건 내 거잖아"

"당신이 TV랑 냉장고는 준다고 했잖아 너무하는 거 아니야?"


전남편과 둘이 돌아서 나오면서  살짝 웃었습니다

맞아요 이혼은 부부의 밑바닥까지 볼 수 있는 최고의 기회죠

그 남자가 얼마나 치졸한지. 나에게 베푸는 것을 얼마나 아까워하는지, 그녀가 우리 가족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었는지 서로에게 밑바닥을 보여야만 끝나는 게 이혼인 거 같아요



저희도 그랬어요

밑바닥까지 봤죠.

15년 결혼생활 중 드물지만 좋았던 기억까지 똥칠을 할 만큼 밑바닥까지 봤었던 것 같네요


돈 몇 푼에 싸우고 금방 말을 바꾸고 물건들에 소유권을 다투고 상대방 가족에 대한 귀책을 찾는 그런 밑바닥까지 보는 과정을 거치면서 그간의 정을 떼고 이혼조건들의 윤곽을 잡고 합의서를 작성하면서 다시는 딴소리 말라고 단단히 약속을 받은 후에야 "협의가 된 이혼"이 성립됐죠


지금 돌아보면 그 과정에서 남아있는 부부간의 정을 정리하는 과정이었던 것 같아요


저는 비교적 원만히 해결된 편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아들을 위해서 원수처럼은 지내지 말자는 대 전제가 합의된 상황이라 합의를 정리하는 과정이 오래 걸리진 않았지만 대부분의 이혼은 늘 많은 상처들을 남기게 되더라고요



만약 이혼 과정에서 전남편이 모든 걸 다 양보하고
내게 맞춰줬다면 지금 나는 어땠을까?  

저는 그리 바람직하진 않았을 것 같아요


그의 마지막 모습이 15년의 결혼생활 힘들었던 기억과는 상관없이 배려있는 모습으로 남게되는게 억울했을것같아요


맘 약해질 때 혹시라도 그 힘듬을 잊고 마지막 모습이 그의 모든 모습으로 기억의 왜곡이 생길까 봐 싫더라고요

그냥 나쁜 사람, 이기적인 사람으로 남길 바랬어요


바보같이 그 세월들을 다 잊고 좋은 사람으로 기억하고 싶진 않았거든요

마지막까지 그리 밑바닥을 보여줘서 고맙다고 생각이 들기도 하더라고요.

덕분에 그 과정에서 미련도 정도 다 태워버리고 온전히 새로 시작할 마음이 생겼던 것 같아요


그가 잘해줬다면, 배려했다면 미련한 저는 어느 순간 '내가 변했다면 달라지지 않았을까? 내 탓이 있지 않았을까?' 분명히 제 탓을 하고 있을게 뻔했거든요


이혼 과정에서 흔히 말하는 진흙탕 싸움.

안 볼 사이니까. 

더 이상 부부가 아니니까. 

정말 마지막이니까 

서로에게 독하리만치 싸우게 되더라도 그 과정이 서로에서 마지막 남은 미련도, 기대도 다 체념하게 만드는 정리를 위한 마지막 과정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진흙탕 싸움을 적당히 거친 저와 전남편은 그래도 한 달에 두, 서너 번의 통화를 하면서 아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물론 대부분은 전남편의 잔소리가 대부분이지만..)  일 년에 서너 번 같이 저녁을 먹으면서 각자의 이야기를 하면서 


"얼렁 연애해서 제발 우리한테  관심 좀 끊어라~"

"너는 연애하지 마라. 아들 다 크고 나면 그때 연애해라 "

"네가 뭔데 내 연애를 터치하냐? 내가 알아서 할 거야. 너나 여자 만나. 꼭 너 같은 여자로 ~"

웃으면서 덕담 아닌 덕담을 하는 적당한 거리에 전 배우자로 남아있습니다.


이혼 과정에서 모든 미련과 모든 기대를 다 태워버리고 나니 그에게 바라는 것도 없어지고 기대하는 것도 없어져서 맘이 편하더라고요


그저 '양육비나 밀리지 말고 잘 보내주면 할 도리 다 하는 거지..'라고 생각하니 맘이 편해졌습니다


다 비워내야 채울 수 있습니다

밑바닥을 봐야 정리할 수 있고요

미련이 없어야 새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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