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와 현실의 공통점
연일 화제였던 #부부의세계가 끝났다.
한 회도 빼놓지 않고 늘 본방사수하면서 괜스레 감정이 이입이 되었던 것 같다.
처음 남편의 배신과 맞닥뜨린 지선우의 감정과 뻔뻔하기 이를 데 없는 이태오와 여다경의 태도에 같이 부들부들 떨면서 지선우가 느낄 감정들을 누구보다 잘 아는 나였던지라 김희애 배우가 표현하는 지선우의 모습이 정말 더함도 덜함도 없는 배신당한 배우자의 감정 그 자체구나 느꼈더랬다.
배우자의 배신을 맞닥뜨리는 부부의 대부분의 반응이 지선우처럼 차분하긴 쉽지 않다.
차분하게 뒤를 밟고 변호사를 찾아가 조언과 계좌정보를 위해서 누군가와 모의를 하고 하나하나 함정을 파면서 그 증거들이 완벽해질 때까지 모른 척 연기하기는 정말 무척이나 비현실적이다.
배신의 사실을 알게 되는 바로 그 순간 손발이 떨리고 머릿속은 하얘져서 당장이라도 멱살을 잡고
"이실직고하지 않으면 내가 널 죽일지도 모르겠다"는 분노를 퍼붓고 싶은 마음을 다스린다는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실을 말해준다면 없었던 일로 하고 넘어가 주겠다.
제발 거짓말은 하지 말아라"
저 대화의 저변엔 "내 가정은 반드시 완벽해야 하고 절대로 깰 수 없다"라는 오만함과 불안함이 함께 내재된 것이 아닌가 싶었다.
지선우는 처음부터 홀로서기가 준비된 사람이 아니라 배신의 과정을 정리하면서 일어설 준비를 스스로 처절하게 한 캐릭터가 아닌가 싶었다.
한편으론 그녀의 그 태도
"사실대로 말하면 용서하겠다"라는 그 말이 충분히 이해가 되고도 남았다.
할 수만 있다면 가정이 파탄 나고 부서지는 일은 피하고 싶을 것이다.
모른 척 살다 보면 이 사람도 정신 차려서 미안한 마음에 가정에 더욱 충실할 수도 있지 않겠나?.
아이가 있는데 아이를 생각해서라도 가정이라는 울타리는 지켜져야 하지 않을까?
난 아직 세상 속에 혼자 설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니 준비가 될 때까지만 네가 좀 필요하다.
살다 보면 실수처럼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갈 수도 있지만 내가 더 잘해주면 결국 나밖에 없다는 걸 알고 후회할 거야.
모든 이혼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다른 건 아무것도 잃지 않고 너 하나만 도려내겠다"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니 드라마에서라도 부디 시원하게 현실화되길 바랬는지도 모르겠다.
이혼을 한 내 입장에서 본 <부부의 세계>의 가장 큰 장점은 이혼 후의 삶을 비교적 현실적으로 표현한 부분들이 많았던 것 같다.
부부 사이가 원수가 되어서 너란 인간 다시는 숨소리도 듣고 싶지 않으니 꺼져버려라. 니가 한 배신이니 아이 볼생각은 하지도 말아 하면서 면접교섭도 양육비도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지만 아이들을 생각한다면 적어도 아이에게 엄마, 아빠의 자리는 강제로 뺏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엄마, 아빠의 권한이 아니라 아이의 권리이기 때문이다.
#이혼이라는 건 부부로써 남편, 아내의 관계와 역할이 끝났을 뿐 부모로서의 책임이 끝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양육하고 있지 않더라도 또는 상대방이 양육하지 않으니 이 아이는 이제 당신과는 상관없잖아 라고 한다면 아이의 의사와 상관없이 강제로 한쪽 부모의 자리를 경험하지 못하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나는 전남편과 한, 두 달에 한 번씩은 통화를 한다. 아이의 학교 문제나 기타 건강문제에 대해 이야기해주고 잘 자라고 있으니 걱정마라(대부분은 잔소리 좀 하지 말아라 이지만...), 아들이 요즘 사격을 하고 싶어 하니 시간 되면 데리고 가서 같이 놀아줘라 등의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요즘 대화의 대부분은 2차 성징이 일어난 아들을 남자인 니가 좀 대처해주면 좋겠다. 얘기해본후에 나에게 다시 전달해다오 라는 주제가 대부분인것 같다.)
전남편의 본가에도 한 달에 한 번씩은 보내는 것 같다. 같은 이유다. 아들에게 할머니, 할아버지와의 추억을 뺏을 권한이 내게는 없기 때문이다
그들과의 관계를 끊을 수 있는 건 오로지 아들의 선택뿐이다.
(물론 현실적으론 개차반인 배우자들이 많아서 이 또한 비현실적으로 들리긴 할 수도 있다)
서로의 어떤 점이 싫어 이혼을 했든 그것이 해결되면 모든 게 완벽해질 것 같지만 해결된 만큼의 또 다른 문제들이 반드시 그 자리를 메우게 된다.
사회적 배척일 수도, 경제적 어려움일 수도, 지선우처럼 자녀의 방황일 수도 있다
세상은 공평해서 행복과 불행은 늘 일정량을 유지하는 게 아닌가 싶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덜 힘든 불행을 선택하는 것뿐이다
지선우는 이태오만 도려내면 모든 것이 완벽해질 거라 생각했지만 고산이란 지역에서 입방아에 오르는 이슈거리가 되었으며, 병원에선 이혼녀라는 핸디캡을 이유로 부원장 자리에서 내려왔고, 그녀의 아들은 또 다른 피해자가 되어 누구보다 아프게 방황해야 했다. 그런 자녀의 방황을 지켜봐야 하는 건 이태오에 대한 배신감에 치를 떨었을 때의 고통보다 더 견디기 힘들었을 수도 있다.
그러니 이혼했다고 모든 게 다 완벽해지진 않는다.
지선우 주변엔 참 오지랖 넓은 사람들도 많아서 일거수일투족을 왜 이리도 관심 갖고 얘기하길 좋아하는지 나 같으면 울화통 터져서 진작 이사가 고도 남았을 것 같다.
하지만 드라마보다 더 많은 시선들과 소문들이 이혼을 한 사람을 평가하는 잣대로 사용되는 게 현실인지라 이런 시선을 완벽하게 해소시킬 수 없다면 내가 스스로 당당해지고 잘 사는 방법밖에 없다는 걸 지선우를 통해서 보여준 것 같다.
사람들의 편견을 깨기는 진심으로 어렵다. 내가 웃으면 웃는 대로 화내면 화내는 대로 그들은 이유를 반드시 찾아내서 평가할 것이다.
이혼했다는 것이 자기들과는 다른 평가 기준이 되어서 "저래서 이혼을 한 거구나"라는 결론을 도출하게 한다.
그들을 일일이 설득시키는 수고 따윈 하고 싶지 않다. 그럴 만큼 내 인생에서 중요한 사람들이었다면 진즉 내가 그럴 수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었을 테니 내 인생에 그리 중요하지 않은 사람들의 시선에 메여서 잘 보이고 싶지 않다. 그냥 나로 살려고 한 이혼이니 나에게 당당하면 주눅 들지 않아야 한다.
(그럼에도 역시 자식일엔......)
드라마를 다 보고 난 후
나였다면 저렇게 복수하진 않았을 것 같다.라고 생각했다
난 저런 노력과 시간을 들이는 것조차도 내 전남편에겐 사치라는 생각이 들어서 이혼을 하자마자 그에 대한 미움을 지웠다.
미워하고 분통해하고 원망하며 억울해하는 나의 감정들을 그에게 쏟는 것조차 아까웠다.
그래서 정확히 이혼 절차가 마무리되는날 그에 대한 모든 감정을 지워버렸다.
철저하게 남으로 남게 모든 15년의 감정을 포맷해버렸다. 그에겐 원망도 사치다.
그 순간 내가 생각했던 가장 큰 복수는 오로지
그래 니들끼리 한번 살아봐라.
살다 보면 내가 느낀 고통, 힘듦을 너도 느끼게 될 거다.
지금 네가 뺏어간 그 남자가 어떤 남자인지 네가 꼭 직접 겪어봤으면 좋겠다.
그 여자랑 잘 살아봐라. 아마도 내가 해준것처럼 너한테 맞춰줄순 없을꺼다
그동안 내가 너한테 해준 배려가 어떤건지 뼈저리게 느끼게 될꺼다.
그 사람과 헤어질 수 있게 해 줘서 너희 둘 모두에게 너무 고맙게 생각한다.
실제로 얼마 전 통화에서 전남편에게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내 인생에서 제일 잘 한일이 너랑 이혼한 일인 것 같아. 그때 겁나서 이혼하지 못했으면 아마도 난 지금 이렇게 행복할 수 있다는 걸 절대 모르고 살았을걸? 이혼하자고 해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넌 절대 모를 거야"
그 이야기를 들은 전남편의 대답은 "그렇게 행복하니?"였다
이 정도면 뭐... 가장 큰 복수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