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uri Mar 05. 2021

영화 <소울>과 세상의 잉여들

<소울> 감상문

성인이 되어 문득 하늘을 올려다봤는데 구름이 너무 예뻐서 눈물이 왈칵  적이 있었다. 몸은 감정에 즉각 반응하는데 머리는 시니컬해서, '이거 혹시 우울증일까.' 하고 잠시 진지하게 생각했다. 픽사의 <소울> 보면서도 구름이 예뻐서 울었던 것과 비슷한 느낌으로 울컥했다.



가끔씩 삶이 인간에게 안겨주는 실망감에 대해 생각할 때가 있다. 동시에 떠오르는 장면은 2011년 대구 중학생 집단 따돌림 사건에서 괴롭힘 당하던 아이가 자살하기 전, 예행연습을 위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며 서럽게 우는 장면이 아파트 cctv에 찍힌 것이나, 작년 정인이 사건 때 아이가 죽기 전날 모든 것을 체념한 듯 우두커니 앉아있는 뒷모습이다. 그 장면을 떠올릴 때면 이 세상이 정말 멋질 것이라고 기대하고 태어난 맑은 영혼들이 너무도 무자비하게 짓밟혔다는 사실에 가슴이 꽉 막혀 체한 듯한 기분이 든다. <소울>의 22가 "여기서 영혼은 다칠 수 없어. 그건 지구에서의 삶을 위한 일이지."라고 말한 것처럼 그들이 왜 이토록 고통스러운 삶을 견디다 가야 했는지, 삶에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지 회의가 들기도 한다.


살다 보면 (특히 사회생활을 하면서) 함께 있는 상대방의 가치에 대해 평가할 때가 많이 있다. 한 회사 면접에서는 '일을 잘하지 못하는 사람에 대해 회사에서는 어떻게 해야 한다고 보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전에 프로젝트 중심으로 그때그때의 팀원이 달라지는 20명 안팎의 회사를 다닐 때 각 직원의 업무능력이 한눈에 보였었고, 누군가가 업무를 오랫동안 헤매면 그 사람은 물론이고 팀원들도, 회사도 난처해했다. 회사 입장에서 생각하면 계속 성과가 안 나오는 직원을 내보내고 싶은 마음에 공감하면서도, 워낙 담당하는 업무의 범위가 그때그때 달라져서, 다음 프로젝트에서 나 역시도 '그 사람'이 되면 어떡하지라는 두려움이 꽤 컸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재밌게 보는 유튜브 채널에서 '루돌프' 노래를 비판하는 영상이 있었다. 루돌프는 다른 사슴들과 다른 모습 때문에 놀림을 받아왔지만, 그가 무리로부터 받아들여진 결정적인 순간은 산타로부터 그의 코가 "쓸모 있다"라고 평가된 순간이라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누군가의 가치는 그 사람이 집단에게 주는 기여도와 비례한다. 이에 따라 우리는 소속된 집단에 기여할 것이 없어지는 순간 자신의 가치 역시도 사라졌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 같다.


<소울>에서 누군가의 삶의 목적이 그 사람의 꿈일 것이라고 추측한 주인공 조의 생각이 재밌었다. 심지어 조의 꿈은 단지 피아노를 평생 치는 것도 아니었고, 훌륭한 밴드에 합류하는 것이었다. 자신만의 기준에 도달하지 못하고 죽은 조는 자신의 삶을 '의미 없는 인생'으로 치부했다.


나 역시도 생산적인 것을 좋아하고 꼭 필요한 존재로 인정받고 싶어 한다. 그래서 언젠가 내가 누군가의 짐이 되고 세상의 잉여인이 되어야 하는 상황이 오면 어떡할까 하는 두려움이 있다. 사람은 누구든지 몸이 아플 수 있고, 나이 들어서 쌓아온 능력과 지식이 쓸모없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쓸모없고 가치 없어질까 봐 긴장하며 사는 사람들에게 <소울>은 이 세상에 태어난 것만으로도 잘했다며 다독여주는 느낌이었다. 세상의 누군가는 그런 따듯한 얘기를 해줘야 하는 것 같다. 영화를 보면서 어릴 때 내가 무엇을 만들어내고 그리든 간에 객관적으로 비판했던 엄마에 반해 (엄마 미안), '유리아가 그린 건 다 좋아.'라고 해주던 (당시에 '그거 아무 의미 없는 말이잖아.' 하고 느껴졌던) 아빠의 상냥한 말이 생각났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