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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ri Jan 11. 2021

순수하지 못한 연애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감상문

담백한 멜로 영화가 내게 더 흥미롭게 와 닿는 이유는 지나치게 로맨틱한 멜로 영화들보다 현실 연애와 더 유사한 면이 많다고 느껴져서이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어렸을 적 오묘한 분위기에 이끌려 일곱 번 정도 돌려보았는데, 몇 번 보다 보니 처음에는 보이지 않았던 부분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끊임없이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자신의 존재 의미를 확인하려고 한다. 약한 여성을 구제하여 히어로가 되고자 하는 남성들의 영웅심리나, 나쁜 남자를 따듯한 보살핌으로 나은 사람을 만들려고 하는 여성들의 모성본능이나 평강공주 콤플렉스는 타인을 통해 자신의 존재가치를 높이고자 하는 심리가 깔려 있다고 생각된다. 이토록 극단적으로 가지 않더라도 연애에서는 알게 모르게 Give and Take가 있고 (사실 대부분의 인간관계들이...)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연애를 통한 자아실현을 이루고자 한 츠네오의 모습에 초점을 많이 맞췄다고 생각된다. 조제와 츠네오가 처음으로 섹스를 하기 전에 나오는 둘의 대사가 있다. 이 대사 조금 전에는 조제 옆집 변태 아저씨가 쓰레기를 버려주는 대신에 조제에게 가슴을 보여달라고 했다는 얘기가 나온다.


조제: '해도 돼'

츠네오: ‘아니 그래도'

조제: 왜?

츠네오: '나는 옆집 변태 아저씨랑 달라.'

조제: ‘달라?’

츠네오: ‘...응’

조제: ‘뭐가 다른데’

 

에이브러햄 매슬로의 욕구단계설에서 자아실현은 인간에게 달성될 수 있는 최종 단계의 발달욕구다. 좋다 나쁘다를 떠나서 변태 아저씨는 조제를 통해 가장 아래단계인 생리적인(성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하고, 츠네오는 최종단계이기는 하나 스스로를 더 나은 사람으로 인식하기 위한 자아실현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했다면 이 둘이 조제에게 접근하게 된 계기가 그리 많이 다른지를 되묻는 듯한 대사로 느껴졌다.




츠네오는 원래 럭비선수였지만 부상으로 인해 현재는 럭비를 못하고 있다. 그는 특별히 똑똑하거나 성격이 좋아 보이지도 않는다. 새벽에는 마작 게임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고, 친구이자 섹스파트너인 노리코와 대화하며 학교의 퀸카인 카나에가 자신에게 진로 상담을 했다고 자랑하는 가볍고 평범한 사람이다. 그래도 여자에게 인기는 있는지, 학교에서 남학생들의 선망의 대상인 카나에와 결국 사귀게 된다. 이 카나에라는 인물은 츠네오와 같은 방에 누워있어도 잠자리를 쉽게 가지지 않는 조신한(?) 여성이며, 원어민과 영어회화도 세련되게 잘하는 사람이다. 많은 면에서 츠네오보다 우수한 그녀 앞에서 츠네오는 작아진다.


하지만 그런 츠네오도 조제를 위해서는 해줄 수 있는 것이 많다. 조제는 첫 만남에서부터 유모차를 타고 겁에 질린 모습으로 츠네오 앞에 나타난다. 일반인들에게는 일상적인 산책도 칼을 들고 다니면서 해야 할 만큼 그녀에겐 쉬운 일이 아니다. 조제와 츠네오의 두 번째 만남에서는 조제는 산책 도중에 습격을 당해서 얼굴에 상처를 입고 있다. 왜 그렇게 산책에 집착하느냐는 츠네오의 질문에 조제는 고양이와 꽃이라던지 여러 가지 봐야 한다고 대답한다. 조제의 꿈들은 츠네오가 쉽게 이루어줄 수 있는 소박한 것들이다. 그녀를 밖으로 데려가 주고 사강의 후속작만 구해줘도 그녀에게는 큰 존재가 되어줄 수 있다. 주변 사람들은 장애인을 챙긴다며 츠네오를 칭찬도 해준다.


영화에서는 여성이 자신의 부족함을 무기로 남성들을 유혹한다는 뉘앙스의 대화가 두 번 나온다. 첫 번째는 츠네오의 섹스파트너 노리코가 카나에에 대해 얘기하면서, 그녀가 눈을 45도 올려다보면서 '상담'을 하고 싶다고 말하면 남자들이 다 넘어간다면서 비꼬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카나에가 남자친구를 빼앗은 조제에게 따지러 갔을 때 조제가 걷지 못한 것을 두고 '그쪽이 가진 무기가 부러워'라고 얘기하는 부분이다. 여성의 부족함은 남성들로 하여금 영웅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조제가 의도하지 않았어도 조제의 장애도 츠네오에게는 영웅이 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또한, 츠네오는 조제를 세상과 연결 짓는 유일한 통로로서의 우월감도 맛볼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츠네오는 문을 두드리고 누구냐고 묻는 조제에게 자신밖에 없는 듯, 언제나 '나'라고 대답한다.


가족들에게 조제를 소개해야 한다는 현실에 부딪혀 츠네오가 부담을 느끼기 시작하던 시점에 츠네오는 이상한 옷차림으로 길거리에서 담배 홍보를 하고 있는 전 여자 친구 카나에와 마주치게 된다. 카나에는 츠네오에게 자신이 조제를 두 번 때렸다고 시인하고, 츠네오는 카나에 역시도 그리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 이 모습 가장 보이기 싫은 사람한테 보여버렸어'라고 창피해하는 카나에의 나약한 모습에 츠네오는 다시 호감을 느낀다. 시간이 갈수록 부담스럽게 느껴진 조제보다 카나에가 더 마음 편한 대안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처음부터 조제는 츠네오가 자신과 오래 있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것은 카나에도 알고 있었던  같다. 그녀는 츠네오가 조제에게는 자신이 있어줘야 한다고 했지만, 츠네오는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 아니라고 말한다. 츠네오 의문의 -1) 그녀는 처음 읽고 있던 사강의 책에서 자신과 주인공 조제를 동일시하고, 물고기 모텔에서도 언젠가  관계가 끝날 것임을 알고 말하는 대사들이 있다. 츠네오의 가족들을 만나러 가기 , 코지가 조제에게 결혼하는 것이냐고 묻는 질문에, '결혼? 그럴 리가 없잖아.'라고 대답한다. 조제는 츠네오의 가족들에게로 가는 여행 도중 츠네오의 망설임을 느끼고는 그를 배려하듯 네비를 끄고 바다를 보러 가자고 말한다. 조제는 카나에가 자신을 찾아와서 때렸다는 얘기도 츠네오에게 옮기지 않았고, 엄마가 없어서 다른 친구들에게 분풀이를 하던 보육원 동기인 코지에게 엄마가 되어주겠다던 유치원 때 했던 약속을 지금까지도 지키고 있다. 조제는 츠네오가 떠나는 것에 대해서도 원망하지 않고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우리가 타인에게 호감을 느끼고 사랑에 빠지는 계기는 어쩌면 자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순수하지 않을 수도 있다. 스스로가 좀 더 나은 사람처럼 느껴지기 위해, 자신의 사회적 지휘를 높이기 위해, 자신이 생각하는 조건에 상대방이 충족돼서... '조건만남'이라는 단어가 성매매로 대용되기는 하지만, 사실상 우리는 모두 다 어느 정도의 '조건(에 맞는) 만남'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조건이 어느 날 충족이 되지 않거나, 바뀌거나, 더 나은 조건을 가진 대안이 생겼을 때, 이제는 숫처녀가 아니란 이유로 강아지 미미에게 관심이 떠난 마작 게임장 주인처럼 상대방을 떠나보내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랑을 비관하거나 조제에 대한 츠네오의 감정이 사랑이 아니었다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츠네오는 진심으로 조제를 기쁘게 하고 싶었고, 진심으로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었을 것이다. 단지 조제를 감당할 만큼 강하지 못했을 뿐이다. 츠네오는 조제의 인생에서 떠났지만, 조제는 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츠네오에게 업혀서 휠체어는 타기 싫다고 응석 부리던 그녀는 영화가 막을 내리기 전, 혼자 휠체어를 타고 장도 보고 말끔해진 차림으로 요리도 한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혼자 남겨졌을 때와는 다르다. 어떤 이기적인 이유로 연애가 시작되었든 서로 진심으로 사랑했다면 조제와 같이 타인을 통해 몰랐던 세상을 경험하고 연애하기 전과는 좀 더 강인하고 나은 자신이 되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변태 아저씨와 조제의 거래를 연애와 사랑에 빗대는 것은 조금 많이 나간 면이 없잖아 있지만, 수많은 연애가 모종의 거래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유효기간이 있는 것이다. 조제는 츠네오와 있는 동안에 쿠미코가 아닌 조제로 살 수 있었고, 츠네오는 그런 조제의 영웅이 될 수 있었다. 그 거래는 유효기간이 있었지만 아름다웠다.



난 두 번 다시 거기로 돌아가지는 못할 거야. 언젠가 네가 사라지고 나면.
난 길 잃은 조개껍데기처럼. 혼자 깊은 바다 밑에서 굴러다니게 되겠지.
그런데 말이야, 그것도 나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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