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년 정산 (2019-2021)
임산부들의 앱, '마미톡'의 커뮤니티 글들을 보다가 유산을 했다는 누군가의 글을 보는데 눈물이 났다. 2020년 임신 8주차에 병원을 찾아가 초음파를 보는데, 의사 선생님이 이리저리 초음파 기계를 대보시다가 조심스레 아기집은 있는데 아기는 없다고 하셨다. 모니터를 통해 까맣게 비어있는 아기집 사진을 보는데 마음이 허망했다. 의사 선생님 얘기를 들으면서 남 얘기 듣듯 멍하니 '아아... 네... 네...'하고 나왔는데, 진료실을 나와 남편에게 전화를 걸고는 "아기집에 아기가 없대."라는 얘기를 꺼내는 순간 목소리 끝이 떨리면서 엉엉 울어버렸다. 너무 심하게 우니 간호사도 휴지를 뽑아 들고 오시고 의사선생님도 진료실로 다시 부르셔서 3개월 안에 다시 임신해서 찾아오시는 분들도 계시다며 위로해주셨다. 남편이 소파수술 후에 맛있는 것을 사주며 위로해주려고 하고, 스스로도 빨리 털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지만, 사람 감정이 그리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몇 주간 마음이 추슬러지지 않아, 보지도 못한 아기를 위한 혼자만의 애도기간을 가졌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2019년부터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라고 2021년까지 얘기했었다. 나는 그전까지 스스로를 운이 아주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왔고, 작게는 한턱을 쏘는 친구들과의 가위바위보 내기부터 크게는 대학교 기숙사 당첨까지, 나에게 나쁜 일은 잘 일어나지 않는다는 막연하고 이상한 자신감이 있었다.
하지만 2019년 말부터 나의 3년 요약은 아래와 같았다.
- 2019.09: 스트레스로 불면증에 시달리던 중 충동적으로 퇴직
- 2020.03: 아기 유산
- 2020.10: 파트타임, 겸임교수 등 하며 2020년 마무리 (프리랜서 생활이 나와 안 맞는다는 것을 알게 됨)
- 2021.02: 얼떨결에 스타트업에 입사 (새로운 문화에 적응하는데 반년 가량 걸림)
- 2021.03: 심장병원에서 임신을 1년 정도 미루도록 권장 받음
- 2022.05: 아빠가 뇌종양으로 수술받으심
사실 커리어적인 부분에서는 겸임교수든 파트타임이든 스타트업이든 좋았던 부분들도 있었지만, 일을 정말 좋아하고 열심히 하는 것에 반해, 커리어의 방향성을 잡는 부분에서는 원하는 것이 늘 모호했고 확신이 없었다. 그리고 이 확신 없음이 상황에 완전하게 만족하는 데에 큰 방해가 되었다.
하지만 2021년 후반부터는 상황이 조금씩 나아졌다. 새로운 회사 문화에도 드디어 적응이 되기 시작했고 회사에 대한 애착도 많이 생겼다. 1년 정도 걸릴 수 있다는 심장치료도 생각보다 빨리 끝나, 9월에는 다시 임신 시도를 해도 된다는 얘기를 들었고 남편의 리스본 출장에도 함께 따라가게 되어 코로나 이후 처음으로 나가는 해외여행이 정말 즐거웠다. 올해 초에는 회사와 팀원들의 양해를 얻어, 2-3개월 간 남편의 미국 출장을 함께 따라다니며 원격근무를 할 수 있었고, 새로운 방식으로 업무를 즐겁게 하다가 올해 2월, 뉴욕에서 임테기에 다시 두줄이 그어졌다.
아기가 생긴 것을 알게 된 순간 기쁨과 동시에 걱정이 들었다. 뉴욕에 있을 때 하루에 2만보씩 걸어 심장 상태는 좋았지만, 아기가 없어진 기억이 있었기 때문에 무서웠다. 특히 이전에 문제가 생겼었던 8주 차에는 병원에는 나 혼자 가겠다고 남편에게 말하였다. 혹여라도 안 좋은 소식을 듣게 된다면 누가 옆에 없는 편이 마음이 더 편했다. 의사 선생님은 2년 전과 같은 분이셨다. 초음파를 보는데, 아기는 잘 있었고 심장도 힘차게 뛰고 있었다. 모니터 속의 아기가 팔다리를 꼬물꼬물 움직이는 것을 보는 순간 울컥하여 기뻐서 또 울었고, 의사 선생님은 내가 드디어 웃는다고 하셨다. 선생님이 말씀하시기 전까지는 내 표정이 긴장으로 굳어져 있는지도 몰랐다. 검진 후 집에 돌아가는 길, 내 삶의 먹구름이 걷히는 느낌이 들었다.
그 후에도 막연하게 불안한 마음이 드는 날들이 있었다. 그럴 때면 올해 초 교회 자매 두 명과 시작한 아침 통독 모임에서 읽은 말씀이 큰 힘이 되었는데, 사무엘상에서 한나가 성전에 가서 술 취한 사람처럼 울며 자녀를 달라고 기도하는 것을 본 엘리 제사장이 다가가서 얘기를 나누는 본문이었다. (사무엘상 1:17-18)
그러자 엘리가 말하였다.
“그렇다면 평안한 마음으로 돌아가시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그대가 간구한 것을 이루어 주실 것이오.”
한나가 대답하였다. “제사장님, 이 종을 좋게 보아주시기 바랍니다.”
한나는 그 길로 가서 음식을 먹었다.
그리고 다시는 얼굴에 슬픈 기색을 띠지 않았다.
여기서 내 마음에 와닿은 부분은 한나가 다시는 슬픈 기색을 띠지 않았다는 부분이었다. 기도를 하고 하나님께 나와 아기의 건강을 지켜달라고 말씀을 드렸으니, 더 이상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것은 불신이었다. 최선의 것을 주시는 그분을 믿고 마음의 평안을 가질 수 있도록 기도드렸다. 임신 기간 중 살이 많이 쪘는데도 불구하고 신기하도록 혈압도 정상이고, 많은 노산인 산모들이 걸리는 임신성 당뇨도 임신중독증도 걸리지 않았다. 다음 주 월요일에 드디어 출산날짜가 잡혔다. 이전 병력 때문에 조심의 조심을 기하기는 하지만, 지금까지 지켜주신 하나님께서 끝까지 잘 지켜주시리라는 믿음이 있다.
암흑기로 해석한 이 3년이라는 시간 동안에 내 안에 많은 확신들이 무너졌고, 나의 견고해 보이는 삶이 한순간에 수렁으로 빠질 수 있다는 것도 알게되었다. 인생에 무엇 하나 견고한 것이 없다. 그리고 훗날 이 시기를 다시 돌아보게 된다면 단순한 "암흑기"로 부르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이제서야 든다.